해리 —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몸이 거기 있을 때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by 응시

1. 장면

피콜라 브리들러브는 열한 살이다. 가난한 흑인 소녀. 갈색 눈. 피콜라는 파란 눈을 원한다. 셜리 템플의 눈. 금발 인형의 눈. 이 사회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눈. 파란 눈만 있으면 어머니가 사랑해 줄 것이고, 아이들이 놀리지 않을 것이고,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피콜라는 믿는다.


아버지 촐리가 피콜라를 강간한다. 두 번. 피콜라는 어머니에게 말하지만 어머니는 믿지 않는다. 피콜라는 임신하고, 아이는 죽어서 태어난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가장 푸른 눈》은 이 소녀의 이야기를 피콜라의 시점이 아니라 또래 소녀 클로디아의 시점으로 서술한다. 피콜라의 내면은 소설 대부분에서 접근할 수 없다. 마지막 장에서야 피콜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때 피콜라는 혼자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친구가 옆에 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친구. 피콜라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존재. 그리고 피콜라의 눈은 여전히 갈색인데, 피콜라는 자기 눈이 파랗다고 믿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파란 눈을 갖게 되었다고.


피콜라는 미쳤는가. 세계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물어야 한다. 이것은 광기인가, 생존인가.


2. 명명

해리. 이 방어기제는 다른 모든 방어기제와 결이 다르다. 억압도, 투사도, 합리화도 의식이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해리는 처리가 아니다. 탈출이다.


해리가 작동하는 조건은 구체적이다. 물리적으로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몸에 일어날 때. 특히 어린아이가 반복적 폭력을 당할 때. 아이는 도망칠 수 없다. 가해자가 아버지이거나, 가족이거나, 힘으로 제압하는 어른일 때. 몸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대신 떠난다. 의식이 몸에서 분리된다.


13편의 분열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확하다. 분열은 대상을 둘로 가르는 것이다. 이명준은 세계를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었다. 자기 밖의 것을 나눈 것이다. 해리는 자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가 아니라, 자기가 파괴될 위기에서 자동적으로.


3. 독해

왜 해리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1편의 박완서 화자와 비교하는 것이 가장 명확하다. 둘 다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런데 하나는 억압이고 하나는 해리다.

차이는 세 가지다.


첫째, 트라우마의 원천이 다르다. 박완서의 화자에게 전쟁은 외부에서 온 재난이다. 집과 어머니는 아직 있다. 피콜라에게 가해자는 아버지다. 세계 자체가 가해자다. 안전지대가 없다.


둘째, 탈출 가능성이 다르다. 전쟁은 끝난다. 끝난 뒤 안전한 환경에서 기억을 밀어낼 수 있었다. 피콜라에게 폭력은 끝나지 않고, 안전은 오지 않는다.


셋째, 몸의 침범 여부가 다르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박완서의 화자는 목격자다. 보았지만 몸이 직접 공격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억을 밀어내는 것으로 방어가 된다. 피콜라는 몸이 직접 침범당한다. 몸에서 도망칠 수 없을 때, 기억을 밀어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의식 자체가 몸에서 떠나야 한다.

억압은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고, 해리는 자기를 밀어내는 것이다.


11편의 격리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격리는 감정을 사건에서 분리하는 것이었다. 해리의 초기 단계는 격리에 가깝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끼지 못하게 감정을 차단하는 것. 그러나 폭력이 반복되면 격리로는 부족해진다. 감정을 분리해도 몸의 감각은 남아 있고, 그 감각이 매번 돌아온다. 격리의 벽이 무너질 때, 마음은 한 단계 더 극단적인 방어로 이행한다. 감정만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를 분리하는 것.

해리의 네 가지 조건이 피콜라에게 모두 충족된다. 물리적으로 도망칠 수 없다 — 가해자가 아버지이고 집 밖에 갈 곳이 없다. 트라우마가 반복적이다 — 두 번의 강간. 언어화 능력이 없다 — 열한 살 아이가 이 경험을 말로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할 능력은 없다.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믿지 않았다. 보호자가 부재한다 — 어머니는 보호하지 못하고, 공동체도 외면한다.


이 네 가지가 충족될 때, 마음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여기에 없는 것. 몸은 놔두고 마음이 떠나는 것.


해리가 작동하는 방식

소설 마지막 장에서 피콜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들린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친구와 대화하고 있다. 이 친구는 외부의 누군가가 아니라 피콜라 자신이 갈라진 것이다. 모리슨은 두 목소리를 대화체로 쓰되, 친구의 목소리를 이탤릭체로 구분한다.


피콜라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이 친구가 대신 들고 있다. 친구가 "촐리가 너한테 한 거…"라고 꺼내면 피콜라는 화를 내며 막는다. "두 번째는 네가 좋아한 거 아니야?"라고 친구가 밀어붙이면 피콜라는 더 격렬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내 눈 정말 파랗지?"로 돌아간다.


직면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자기에게 맡기고, 자기는 파란 눈의 환상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해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해리의 원인과 형태

여기서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해리를 만든 것은 아버지의 성폭행이다. 파란 눈이 아니다. 파란 눈은 해리의 원인이 아니라 해리가 취한 형태다.


파란 눈에 대한 소망은 성폭행 이전부터 있었다. 학교에서 놀림받고, 어머니는 백인 가정의 아이를 더 예뻐하고, 세상 전체가 "검은 것은 추하다"라고 말한다. 피콜라의 논리는 이렇다. 내가 못생겨서 사랑받지 못한다. 파란 눈만 있으면 달라질 것이다.


성폭행이 이 소망을 환상으로 바꾼다. 성폭행이 현실을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밀어 넣었고, 현실이 무너진 자리에서 이미 있던 소망이 환상으로 실현된 것이다. 집이 무너지는 것이 해리라면, 무너진 자리에 피어난 꽃이 파란 눈이다. 어떤 꽃이 피느냐는 그 땅에 어떤 씨앗이 심어져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 피콜라의 땅에는 사회가 심어놓은 "파란 눈"이라는 씨앗이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가해자는 아버지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피콜라의 현실을 파괴했고, 사회의 기준이 파괴된 자리를 채웠다. 두 가해가 합작해서 해리가 완성된 것이다. 모리슨이 제목을 《가장 푸른 눈》으로 붙인 이유가 이것이다. 가장 푸른 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세계를 떠나는 것. 제목 자체가 해리의 구조를 담고 있다.


해리가 사람을 파괴하는 방식

해리는 생존이지만, 생존의 대가가 있다. 자기를 나누면 자기가 사라진다.


피콜라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이 피콜라인지 알 수 없다. 현실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끊어진다. 학교에 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혼자 걷는다. 보이지 않는 친구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다. 그 친구마저 떠나려 하면 피콜라는 매달린다. "내 눈이 충분히 파랗지 않아서 가는 거야?"


해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만, 삶에서도 벗어나게 한다. 몸은 살아 있지만 세계 안에 있지 않다. 죽이지 않고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해리의 파괴다.


해리에서 돌아오는 길

해리의 치유는 나뉜 자기를 다시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나뉜 이유가 있다. 감당할 수 없어서 나뉜 것이니까, 다시 합치려면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안전한 관계, 안전한 공간, 그리고 시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피콜라에게 그 조건이 없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비극이다. 클로디아가 마지막에 고백한다. "우리 모두가 피콜라를 만들었다." 이것은 해리의 원인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조건을 아무도 주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해리에서 돌아오려면 누군가가 "네가 나뉘기 전의 너를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해줘야 한다. 피콜라에게 그 누군가가 없었다.


13편의 분열과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이명준은 세계를 나누었고,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죽음을 선택했다. 피콜라는 자기를 나누었고, 자기 안에서 현실을 잊었다. 분열의 끝이 외부 세계와의 단절이라면, 해리의 끝은 내부 세계와의 단절이다.


4. 돌아봄

해리는 이 시리즈에서 다른 방어기제들과 무게가 다르다. 억압이나 합리화는 일상에서도 작동하지만, 해리는 일상 너머의 영역이다. 누군가의 마음이 자기를 나눠야 했다는 것은, 그만큼 감당할 수 없는 일이 그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뜻이다.


가벼운 해리는 일상에서도 일어난다. 멍하게 시간이 사라지는 경험,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순간, 기억에 구멍이 뚫린 느낌. 이런 경험이 반복되고 일상을 방해한다면, 그 아래에 마음이 감당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해리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생존의 증거라는 점이다. 마음이 부서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나눈 것이다. 그 나눔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해리하는 캐릭터는 다른 어떤 방어기제의 캐릭터보다 윤리적 무게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리는 극적 장치가 아니다. 실제 생존자들의 경험이다.


해리하는 캐릭터를 쓸 때 핵심은 네 가지 조건의 설계에 있다. 도망칠 수 없을 것. 반복될 것. 말할 수 없을 것. 보호받지 못할 것. 그리고 해리의 원인과 형태를 구분해야 한다. 원인은 폭력이고, 형태는 그 인물이 품고 있던 소망이 채운다. 같은 해리라도 다른 인물에게는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 피콜라에게는 파란 눈이었지만, 다른 아이에게는 다른 환상일 수 있다. 형태를 설계하면, 해리하는 캐릭터에 고유한 비극이 생긴다.


1편과 이 편을 나란히 기억해 둘 수 있다. 같은 트라우마라도 조건에 따라 억압으로 갈 수도 있고 해리로 갈 수도 있다. 안전지대가 있는가, 폭력이 반복되는가, 몸이 직접 침범당하는가. 그리고 11편의 격리가 해리의 전단계일 수 있다. 격리로 버티다가 격리가 무너지면 해리로 이행한다. 이 궤적을 설계하면, 해리에 이르는 과정에 심리적 필연성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