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버림받은 아이가 치유자가 되기까지

by 응시

옥함 속의 울음


왕은 아들을 원했다. 일곱 번째도 딸이었다.

왕비가 산기를 느꼈을 때 궁 안에는 이미 여섯 개의 요람이 있었다. 점쟁이는 이번에야말로 왕자라 했고, 왕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산실에서 들려온 것은 또다시 딸의 울음이었다.

왕은 아이를 보지 않았다. 이름도 짓지 않았다. 옥함에 넣어 강에 띄우라 명했다. 아이는 그렇게 물 위에 놓였다. 떠내려가는 함 속에서 아이가 울었는지, 울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다.

바리데기. 버려진 아이라는 뜻이 곧 이름이 되었다.

아이는 죽지 않았다. 산신 혹은 노부부 — 전승에 따라 다르지만, 누군가가 강가에서 함을 건져 아이를 길렀다. 바리데기는 자신이 왜 버려졌는지 모른 채 자랐다. 궁이 있다는 것도, 아버지가 왕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러던 어느 날, 왕이 병에 걸린다. 어떤 약으로도 낫지 않는 병. 무당이 말한다 — 저승에 있는 생명수만이 왕을 살릴 수 있다고. 여섯 공주에게 차례로 묻지만, 모두 고개를 젓는다. 저승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버려졌던 일곱째뿐이었다.

바리데기는 간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산 자가 갈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부러진 적 없는 뼈는 접합을 모른다


융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원형을 말했다. 치유하는 자는 스스로 깊이 상처 입은 자라는 역설이다. 상처를 부정하거나 회피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바리데기의 서사는 이 원형의 거의 완벽한 구현이다.

먼저, 바리데기의 상처는 존재의 근본에 닿아 있다. 단순히 사랑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로 규정당했다. 아이에게 아버지란 "네가 내 아이다"라고 말해주는 최초의 존재다. 이 한마디가 아이에게는 세상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이 된다. 바리데기는 그 허락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얼굴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승인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융은 이런 상태를 '부성 원형의 부재'라고 불렀다 — 어렵게 들리지만, 풀어 말하면 이렇다. 아이의 마음속에 '나를 인정해 주는 아버지상'이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바리데기라는 이름 자체가 그 부재의 흔적이다.

그런데 설화는 여기서 놀라운 반전을 만든다. 바리데기는 자발적으로 저승행을 택한다. 이 선택이 핵심이다.

여기서 융의 핵심 개념 하나를 짚고 가자. 융은 인간의 마음에 두 개의 중심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자아(ego) — 우리가 '나'라고 의식하는 것, 매일의 판단과 감정을 관리하는 일상의 나. 다른 하나는 자기(Self) —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마음 전체의 중심, 내가 아직 모르는 나까지 포함한 더 큰 나다. 자아가 방 안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는 그 방을 포함한 집 전체에 해당한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서 있는 방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을 열면 복도가 있고, 계단이 있고, 지하실이 있다. 그 지하실에는 내가 넣어둔 기억도 모른 채 먼지를 뒤집어쓴 상자들이 있다. 자기란 그 상자들까지 포함한 집 전체다.

융은 이 자아가 자기를 향해 확장되어 가는 여정을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불렀다. 쉽게 말해, 내가 외면해 온 나 자신의 어둠, 상처, 억눌린 감정을 하나씩 마주하고 받아들이면서 더 온전한 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라 전체가 되는 길이다. 예를 들어, 자기가 겁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상처받으면 아프다는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 밝은 면만이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 포함한 나를, 있는 그대로 아는 일이다.

바리데기의 저승 여행이 바로 이 개성화의 여정이다. 저승은 무의식의 심연에 대한 은유다. 산 자가 갈 수 없는 곳, 의식이 닿지 않는 곳. 바리데기는 그곳까지 걸어 내려간다 — 자아가 자기를 향해 '의식적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저승에서 바리데기는 생명수를 지키는 존재를 만나고, 시련을 겪고, 마침내 물을 얻는다. 그리고 돌아와 아버지를 살린다. 자신을 부정한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들어가, 그 세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유'라는 말을 조심해서 써야 한다. 우리는 치유라고 하면 흔히 상처가 사라지는 것,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융이 말한 치유, 그리고 바리데기의 서사가 보여주는 치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로 살아가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무릎에 오래된 흉터가 있는 사람은, 비 오는 날 무릎이 시리다. 흉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이면 무릎이 시릴 거라는 것을 알고, 미리 담요를 준비하는 사람이 된다. 상처가 없어진 게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치유는 원래의 나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이후의 새로운 나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바리데기는 저승에서 돌아온 뒤 무신(巫神)이 된다.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최초의 무당. 여기서 한국 무속의 독특한 원리를 짚어야 한다. 한국의 무신은 대부분 억울하게 죽은 자, 깊이 상처 입은 자다. 바리데기만이 아니다. 한국 무속의 신격 목록을 보면, 버림받은 아이, 누명을 쓴 여인, 비명에 간 장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처녀 — 이들이 신으로 모셔진다. 왜 상처 입은 자가 신이 되는가.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혼이 강력한 영적 존재가 된다는 관념이 깊다. 굴원(屈原)이 투신한 뒤 단오의 신이 되었고, 관우는 패장의 한을 안고 죽어 전쟁의 신이 되었다.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한(恨)을 품은 자가 가장 강한 영적 힘을 갖는다'는 심층 구조가 존재한다.

융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의식 세계가 거부하고 밀어낸 것 — 억압되고, 부정되고, 묵살된 것 — 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 속에서 점점 더 강해진다. 화가 나는데 화를 참으면 어떻게 되는가. 한 번은 참을 수 있다. 두 번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참을수록 그 감정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압축된다. 어느 순간 전혀 엉뚱한 곳에서 —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사소한 계기에 — 폭발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융은 이 원리가 개인의 감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전체에도 작동한다고 보았다. 한 사회가 특정 존재를 강하게 부정할수록, 그 존재가 품은 에너지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만큼 커진다. 융은 이것을 '보상 작용(compensation)'이라 불렀다.

바리데기가 무신이 된 것은 착한 아이에 대한 상이 아니다. 가장 깊이 버려진 자만이 가장 깊은 곳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속이 상처 입은 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불쌍해서가 아니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굶어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눈빛을 알아보고, 잠을 못 자본 사람이 새벽 세 시의 무게를 안다. 상처는 단순한 손상이 아니라 앎의 통로다. 깊이 아파본 자만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말을 멈추고 그냥 곁에 있을 수 있다. 무속은 이것을 알았다 — 상처의 깊이가 곧 치유의 깊이라는 것을.

이것이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역설이다. 부러진 적 없는 뼈는 접합의 기술을 모른다.

당신의 저승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버려진 경험이 있다.

반드시 부모에게 버려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누군가가 보지 않았던 순간. "너는 이래야 한다"는 기대 앞에서 진짜 나는 옥함 속에 넣어져 강물 위에 놓였던 순간. 그때 우리 안의 바리데기가 태어난다.

흥미로운 것은, 설화가 바리데기에게 복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리데기는 아버지를 심판하러 돌아오지 않는다. 살리러 돌아온다. 이것을 단순히 효(孝)의 미덕으로 읽으면 설화의 깊이를 놓친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용서한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더 위험한 오독이다.

여기서 용서와 화해의 개념을 정확히 해야 한다. 융이 말한 치유의 과정에서 화해의 대상은 가해자가 아니다. 나 자신이다. 상처 입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 상처를 포함한 내 삶 전체와의 화해다. 바리데기가 저승을 다녀오며 달라진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버려진 아이'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던 자아가, 저승이라는 무의식의 심연을 통과하면서 더 넓은 자기(Self)와 만난 것이다.

가해자를 용서해야 치유된다는 말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한 번 더 짐을 지우는 것이다. 융의 개성화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한 감정 — 분노든, 원망이든, 슬픔이든 — 은 있는 그대로 두어도 된다. 다만 그 감정이 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상처가 나라는 사람의 유일한 정의가 되지 않도록, 내 안의 더 넓은 자리를 여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과의 화해다.

바리데기가 아버지를 살린 것은 아버지를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다. 저승을 다녀오는 여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살리는 행위는 그 여정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한국 무속 전통에서 바리데기는 모든 무당의 조상신으로 모셔진다. 버려진 자가 가장 깊은 곳까지 다녀온 자가 되고,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건너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이다.

어쩌면 설화는 수백 년 전부터 이렇게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의 상처를 어디까지 가져가 볼 생각인가. 당신의 저승은, 어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