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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pr 21. 2023

침엽수림

소도 | 'J에게'중에서

다른 대부분의 집들과 달리 J의 집에는 벽걸이 텔레비전이 있었다. 내가 살던 집에는 흔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물론 라디오나 CD 플레이어조차 없었다. 가전제품이라고 할 것은 금색 테두리가 은색으로 바랜 전기밥솥 하나와 요란한 소리를 내는 전기포트 하나뿐이었다. 때문에 J의 집에 놀러 갈 때면, 그리고 J가 나를 잠깐 거실에서 기다리게 할 때면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티브이 앞으로 다가가 그 날렵하고 새까만 화면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직도 나는 J의 집 텔레비전의 전원 버튼이 중앙에 있고, 음량 조절 버튼과 채널 조정 버튼은 왼쪽에, 그리고 무언가와 연결할 목적의 다양한 단자들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텔레비전의 양 쪽에는 기다란 은색 스피커도 두 개 있었는데, 금속 석순 같은 신기한 스피커를 이모저모 살펴보다 나는 차마 J가 돌아오는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J는 그 스피커의 이름이 홈시어터라고, 추가로 시어터는 영화관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라고 아주 친절히 알려주었다. 내 얼굴은 내가 텔레비전에 가진 지대한 관심을 들켰나 보다 하는 부끄러움에 다 썩은 자두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얼마나 신기한 물건인가. J의 집 2층 창문에는 커다란 그릇 같은 것도 하나 붙어 있었다. 같은 반 친구 중 하나는 그 접시가 UFO와 교신하려 만든 것이라고 떠들다가 스카이라이프라는 글씨를 등딱지에 붙인 외부 아저씨가 교장실 창문에 같은 것을 붙이는 모습을 보고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접시는 정말로 교신용 그릇이기는 했다. 그것만 있으면 비디오 재생기에 테이프를 넣지 않아도 미국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J는 토요일 밤이면 부모님과 같이 거실 불을 끄고 영화를 본다고 했다.  그래서 토요일 밤마다 나는 손전등을 하나 켜 놓고 커다란 벽걸이 텔레비전과 그 멋진 물건으로 영화를 보는 J의 가족을 작은 노트에 그리곤 했다.


나는 J와 함께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영상들 또한 아주 뚜렷하게 기억한다. 애초에 그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모습 자체가 상상 이상으로 놀라웠다. 한 번은 급식 문제로 이모와 같이 교장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무어라고 꾸짖는 교장선생님 앞에서 이모와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나는 흘끔흘끔 교장을 닮은 뚱뚱한 브라운관 티브이를 훔쳐보았다. 브라운관 티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작은 장롱과 비슷하게 생겼다. 기본적으로는 키보다 조금 낮고 대신 뒤쪽으로 깊은 모양의 나무 장롱인 것인데, 대신에 그 문을 열면 아주 볼록하고 반투명히 까만 화면이 가득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사실 벽걸이 텔레비전과 꽤 유사하다. 생긴 거나 버튼들만 보자면 단순히 벽에 걸려있냐 아니냐가 유일한 차이점이다.


하지만 똑, 하고 전원을 켜는 즉시 기술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J의 거실 벽에 착 달라붙은 텔레비전은 굉장히 밝고 또 색이 쨍했다. 버튼을 누르면 만족스러운 피아노 멜로디도 흘러나왔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나고 머리의 브이 자 안테나를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브라운관 티브이와 비교하자면 그 폼부터가 다르다. 또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그 쨍한 티브이에서는 작은 인물들도 세밀하게 다 보여 J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장면을 보아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이 지대한 기술의 집약체에 브라운관 티브이를 비교하겠는가.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대단한 학교를 나와서 젊은 나이에 전문가가 된 기술자들 모임이 만들었을 벽걸이 티브이에 비하자면 브라운관 티브이는 당연히 고물과 다를 바 없다. 어떻게 저 커다란 걸 벽에 걸 생각을 했지! 물론 그때에 우리 마을엔 브라운관 티브이조차 없는 집이 더 많았지마는.


같은 반 누군가는 J의 집에 있는 그 티브이 모델이라는 것이 집 한 채 가격이라고 신나게 떠들기도 했는데, 나는 돈에 관해서는 가격을 실감할 만큼 안다는 것이 별로 없었지마는 그 비교 자체로는 바로 납득이 되었다. 아주 만약에, 어느 날에 예를 들자면 내 생일에, 이모가 행복한 표정으로 다가와 우리 이사를 갈까, 아니면 벽걸이 티브이를 살까 하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주 오래오래 고민할 것이다. 지긋지긋한 물양동이들과 습기에 퉁퉁 불은 벽지에 안녕을 고할 것이냐, 아니면 그 봉긋한 벽지에 착 달라붙은 벽걸이 티브이를 선택할 것이냐. 어차피 이사를 가도 집에 재미있는 게 없다면 나는 벽걸이 티브이가 나을 것도 같았다. 아니 벽걸이 티브이만 있다면 집이 못생긴 건 아무래도 괜찮다. 그 날렵한 물건이 집에 있다면 지긋지긋한 벌레들과 창살에 걸린 이모의 나시 티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누구든 가난뱅이 집이라고 흘긋 들여다보았다간 벽에 걸린 커다란 티브이를 보고 나자빠지는 것이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지. 나는 텔레비전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또 다른 사람이 쳐다보기를 괜히 기다린다.


아무튼, 하루는 J가 다녀온 동물원의 팸플릿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내게 그가 다큐멘터리를 보자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신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알겠노라고 했다. 나는 J가 델몬트 주스를 따르는 모습을 대충 보았다. 심심하지 않게 먹을 만한 과자를 거실 테이블에 놓는 모습 또한 대충 보았다. 그 보답으로 나는 조급하지 않게 고맙다고도 했다. 반면에 텔레비전을 켜고 비디오 재생기에 테이프를 넣는 광경은 아주 유심히 보았다. 비디오를 잡는 모양과 그것을 딱 들어맞는 구멍에 밀어 넣는 경건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에 심혈을 아주 기울였다. 심지어 텔레비전 옆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모아 두는 유리 장이 따로 있었다. 홈시어터라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웅장한 소리에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는 몸을 뒤로 주욱 당겼다. J도 나를 따라서 몸을 뒤로 편안히 기댔다. 그 행동에조차 나는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다큐멘터리가 시작하고, 내레이터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들은 매 시간 바뀝니다. 포즈도 위치도 바뀝니다. 주름이 늘고 관절이 약해집니다. 자연은 매 시각 바뀌는 동물들로 살아 숨쉽니다.”


잠시 슬로우모션으로 달리는 쨍한 색감의 치타가 화면 가득 나타나고 내레이터는 이어서 말한다.

"가장 빠르게 위상을 바꿀 수 있는 동물 중 하나인 아프리카표범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 나무 위를 커다란 발톱으로 기어올라갑니다. 그 때문에 자연에서 거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나무에는 몇십 년간의 상흔이 그대로 누적됩니다."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내 시선은 주로 식물들에 꽂혀 있었다. 표범이나 사자나 기린뿐 아니라 가젤이나 곰 같은 동물들 모두 살면서는 볼 일이 없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나는 그 당시에 스테고사우르스니 브라키오사우르스니 하는 몇만 년 전 동물들에 관심을 갖는 반의 아이들도 우습다고 여겼다. 심지어 쉽게 보기 어려운 커다란 동물들은 그저 어른들이 애들을 놀리려고 만들어낸 탈이고, 숙련된 _동물_ 연기자들이 탈을 쓰고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그전 해 크리스마스날에 복지관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돌아온 산타 복장의 담당관님께 죽도록 혼나야만 했다. 하물며 사람은 다른 사람도 연기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동물 옷을 입고 남을 속이는 건 더 쉽다는 게 나의 소견이었다.


하지만 식물들은 다르다. 식물들은 내 주변에도 많았다. 반지하의 집 창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가로수가 있었다. 그 가로수에는 물론 사람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여름이면 가로수의 허벅지깨에도 이파리가 무성해졌고 그러면 우리는 집 안에서도 발가벗고 다닐 수 있었다. 때문에 이모는 그 가로수를 커튼이라 부르며 비가 오는 봄날에 양동이에 받아둔 새는 천장의 물을 가로수 밑동에다 마구 뿌렸다. 식물은 또 있다. 마을 뒷 산에 즐비한 나무들은 나 또한 이름을 알았다. 여름에 넓적하고 겨울에 으슬한 것은 은행나무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얇게 찌르는 것들은 소나무다. 특히 소나무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알래스카니 만년설이니 하는 곳의 나무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아주 추운 지역에 있던 소나무들이 그 움직이지도 않는 커다란 것들이 어떤 사정으로 이 마을 뒷산까지 오기는 왔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이면 어떻게 나무들이 이동해 왔을지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쨌든 나는 매료되었다. 지금은 어디에 매료되었나 말할 수 있다. 그때에는 단순 미국 영상에서 본 것을 뒷산에서도 찾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생각했는지도. 하지만 내가 정말로 매료되었던 것은 지금 회상해 보자면 항상성이었다. 계절에도 상관없이 이파리를 떨구지 않고 소보루빵 같은 까끌한 껍질을 두른 채 사시사철 고정된 그 배타적 조용함에 매료되었다. 100년 동안이나 같은 모습을 유지한 채로 가끔 솔방울이나 떨어뜨리는 그 냉소함에 매료되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단단한 외피를 가지고 주변의 바늘 같은 자극에도 송진조차 야박하게 반응하고 싶었다. 무던하게 내 호흡을 길게 유지하고 싶었다. 사실 침엽수는 나의 대척점인 나무종 이었던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나는 포플러나무에 가까웠다. 맞던 옷은 다음날이면 땡겨지고 모레면 작아지는 억울한 성장속도에 아종 중에는 잡종이 많다는 점도 닮았다. 기둥도 얇아서 치타 같은 동물이 멀리를 둘러보러 올라왔다간 부러질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날이 추워지면 이파리를 후두두 떨어뜨리고 말단부터 얼어버릴 한심한 나무일 것이 뻔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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