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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May 23. 2021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절반, 절반의 진보..."

100가지 단상|노무현과 '유리벽'


'바보'라고 부르길 좋아했던 지지자들, '바보'라고 불리길 좋아했던 노무현.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바보 노무현'. 남들이 손해를 본다고 말려도, 그게 맞다면 굳이 피해가지 않았던 일관된 삶. 


나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여러차례 그 '바보'와 만났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많은 기사를 썼다. 편집국장 때는 청와대에서 세 차례 연속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의 말은 시간이 지난 뒤에 더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아래 글은 '유리벽'에 관한 기록이다.


① 2002년 4월 27일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날 


국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16부작 '주말 정치드라마'인 민주당 국민경선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노무현 후보와 수락연설 직후 15분 동안 짧은 인터뷰를 했다. 장소는 서울 경선이 치러졌던 잠실 실내체육관. 그는 앞서 몇 시간째 릴레이 언론 인터뷰를 진행한 탓인지 지쳐 있었다. 이날 인터뷰에서 첫 질문은 '유리벽'으로 시작됐다.

 

-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당선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후보로 거의 확정됐을 때 인터뷰에서 '유리벽에 갇힌 심정'이라고 했는데, 지금 소감은 어떻습니까. 


"우선 기쁘죠.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깨가 무거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후보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골똘히 생각했던 것이 지금 정치상황과 함께 한국호, 민주호를 볼 때 유리로 만든 감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와 가족을 호주머니 검사 당하듯이 완전히 투명하게 내보여야 하는데, 그것을 생각하니, 아, 이게 좋은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안 좋은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로부터 심하게 공격을 받았는데 무너지지 않았다"며 "이것은 네티즌들이 저를 방어해준 결과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네티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노무현은 대선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조선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하지 않은 후보였고, 그러고도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② 2002년 12월 20일 대통령 당선 직후 민주당 출입기자들과 만찬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후보는 다음날인 20일 저녁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선거기간 동안 자신을 마크했던 민주당 출입기자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당선 축하연이었다. 언론사 반장(선임기자) 20명 가량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 그 날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한 자리였다. 노 당선자에게 피로와 긴장감이 엿보였다. 


그날 노 당선자는 정치자금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다시 국회의원을 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살신성인의 자세로 내 흠부터 드러내고 고해성사를 할 뜻도 있다"며 현실과 괴리된 정치자금법 문제를 반드시 현실화시킨 뒤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나서 '대통령이 된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유리벽에 갇힐 텐데, 그 생각을 하면 약간 답답하기도 하고..."라며 기쁨보다는 걱정을 먼저 했다. 아마 이런 심정은 전날 여의도 한 호텔에서 개표 방송을 통해 대통령 후보 당선 소식을 접한 뒤에 든 느낌의 연장선이었던 것 같다.


③ 2007년 9월 2일, 퇴임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청와대 인터뷰 


9월 2일 오연호 대표와 함께 <인물연구 노무현> 인터뷰를 하러 청와대를 방문했다. 제16대 대통령 임기를 6개월 가량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날 인터뷰는 청와대 대통령 사저에서 진행됐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2002년 12월 20일 기자들과 가진 당선 축하연 자리에서 했던 '정치자금법'과 '유리벽' 발언에 대해 질문했다. 퇴임을 앞둔 시점에서 '5년 동안 청와대 유리벽에 갇혀 있었던 심정'이 어떤지 궁금했다.

노 대통령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약간 미소를 지으며 "잊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다시한번 여쭤봤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지금 깜짝 놀랐다. 두 번째 거(유리벽)는 생각이 나는데, 뭐 평소에 그렇게 생각을 했으니까. (정치자금법 발언은) 지금 다시 생각하니까 생각이 나요. 나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말을 (내가) 했다고 하니까 나도 '아 참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내가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동안에 너무 힘이 들었어요.  아마 지금도 후보들 힘이 들 겁니다.  투명하게 할래야 할 방법이 없어요. 도저히 투명하게 할 수 없으니, 제도적으로 방법이 없으니까 적당히 알아서 할 수밖에 없고요. 합법적으로 정치한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고요. 


그래 놓고 여기에 대해서 단죄는 아주 가혹하거든요. 그러니까 대중 정치인들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거는 완전히 개선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절반밖에 해결 못한 겁니다. 절반, 절반의 진보..." 


'유리벽'에 갇힌 대통령 노무현의 고민은 아주 깊고도 아렸다. 그에게나 그를 떠나 보낸 우리에게나.


※ 오래 전, 개인 블로그 '和而不同'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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