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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May 30. 2021

저자 소개란에 '변호사 흑역사' 써놓은 노무현

100가지 단상|'노무현 고백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노무현 고백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여보,   도와줘>(새터, 1994). 오랜만에 들춰봤다. 표지(1) 펼치면 대개 날개(2) 저자의 이력  소개 글이 나온다. 그런데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 노무현의 사진 아래 본문 내용의 일부를 게재했다.  글에는 저자가 변호사라는  말고 별다른 이력은 나오지 않는다.


저자 소개란에 담긴 내용은 뜻밖에도 '변호사 노무현의 흑역사'였다. 다들 뽐내고 뻐기며 자랑을 늘어놓는 곳에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 사연은 노변이 30대 초반이었던 1970년대 후반의 일인 듯 하다. 1988년 국회에 첫 발을 디딘 그는 1992년 선거에서 떨어졌다. 이 책이 출간된 게 1994년이니 그의 나이 40대 후반, 낙선의 고배를 마신 뒤였다. 이 책을 다시한번 정독해야겠다.


"변호사 개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주머니 한 분이 남편이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며 내게 변호를 의뢰해 왔다. 나는 그 사건을 60만원에 수임했는데, 사실 당사자 간에 합의만 되면 변론도 필요 없는 사건이었다.


당연히 변호사로선 사건을 맡기 전에 합의를 해보라고 권유했어야만 옳았다. 그러나 마침 변호사 사무실에 돈이 딱 떨어져 곤란을 겪고 있었던 때라 그 아주머니가 나타나자 사건을 덩렁 맡아 버렸던 것이다.


사건을 맡자마자 사무장은 나더러 얼른 피의자인 그 아주머니의 남편을 접견부터 하라고 재촉했다. 그건 사무장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피의자를 접견도 하기 전에 합의를 봐 버리면, 그 아주머니가 변호사 선임을 취소하고 해약을 요구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고 접견을 하면 계약금을 반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서둘러 접견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접견한 다음 날 그 아주머니가 찾아와 합의를 봤다며 해약을 요구했다. 난 일단 사건에 착수하면 수임료의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는 변호사 수임 약정서를 보여주면서 돈을 못 돌려준다고 버텼다. 속으로는 미안하고 얼굴도 화끈거렸지만, 당시 사정이 급해 받은 돈을 이미 써 버린 후였다.


그 아주머니는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하는 그 말 한 마디를 내 가슴 속에 던져 놓고는.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려 하는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도 지금쯤은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을 그 아주머니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의 영욕과 진심을 담보로 하여 따뜻한 용서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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