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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Jun 15. 2020

내 인생 최악의 직장상사였던 포털사이트 H이사

100가지 단상|지우고 싶은 기억


내 주변에서도 아는 이가 많지 않지만, 오래 전 잠시 포털사이트에 근무한 적이 있다. 1, 2위권은 아니다.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서 들어갔는데, 3개월도 못 채우고 사표를 내고 나왔다.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비정규직 팀원들에게 대한 평가는?

"다시 뽑으세요."


나는 팀장이었다. 다섯 명쯤 팀원이 있었다. 두 명은 정규직, 나머지는 비정규직으로 기억한다. 갓 대학을 졸업했던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다를 바 없이 일을 했다. 임금은 절반 이상 차이 났다. 열심히 하면 입사 6개월 뒤에는 평가를 거쳐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는 게 그들에겐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평가 시점을 한 달쯤 남겨둔 어느 날, 나의 직속 상사인 H이사에게 메신저로 물어봤다. '어떻게 평가하고, 누구를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인지.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금 물어봤다. '회사가 그들에게 한 약속이고, 계약기간이 끝나가니, 그들에게 가타부타 이야기를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6자의 짧은 답이 돌아왔다. "새로 뽑으세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 전원이 탈락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애초 회사가 약속했던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박탈 당했고,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얼굴을 보기 미안했고, 힘들었다.  


모멸감 가득찬 메일

읽기 전에 받아본 사과 메일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주말도 집이라는 공간만 다를 뿐 나머지 숙제를 해야 했다. 사무실은 적막했다. 모든 일은 메신저와 메일, 인트라넷으로 진행됐다. H이사는 종종 별다른 설명없이 과제를 툭 던져줬다.


어느 날, 약속한 날까지 보고서를 낼 수 없어 H이사에게 이삼 일 말미를 달라며, 토요일까지 메일로 보내겠다고 했다. H이사는 탐탁치 않아 하면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토요일에 집에서 H이사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 개인 메일함을 열어봤더니 H이사가 보낸 메일이 있었다. 의아했다. 회사 메일로만 소통하는데, 무슨 일이길래 개인 메일로 보냈을까? 열어봤더니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월요일 아침, 평소처럼 출근해서 회사 업무용 메일함을 열어보고서야, H이사가 왜 주말에 부랴부랴 내게 아주 정중한 사과 메일을 보냈는지 알게 됐다.


워크홀릭인 H이사는 주말에 출근해 평소처럼 업무 메일의 받은 편지함을 점검했다. 팀장 폴더에 내가 보낸 보고서가 없자, 또 마감 약속을 어겼다고 오해했다. 나를 괘씸하게 생각했는지, '그 따위로 일하지 말라, 그렇게 할 거면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 둥 모멸감 가득찬 말이 담겨있었다.


전후 상황은 이렇다. 내가 집에서 보낸 메일이 회사 인트라넷 방화벽 때문에 팀장 폴더가 아닌 기타 폴더에 담겼던 것이다. H이사는 팀장 폴더만 확인하고, 모멸감 가득찬 메일을 내게 보낸 것이다. 뒤늦게 기타 폴더에서 내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고는 부랴부랴 내 개인 메일로 사과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집에서 사과 편지부터 봤던 것이고.


오늘 A라는 일을 던져주고,

다음날 '왜 B를 안해놨냐'고 다그쳐


H이사의 업무 체크 방식은 독특했다. A라는 일을 던져주고, 다음날 '왜 B를 안해놨냐'고 다그친다. 그 다음날은 C와 D를 해놔야 하는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나는 무능한 팀장이었다. 쉬는 시간, 다른 팀장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정도 차만 있을 뿐 동병상련이었다.


나를 여기에 소개시켜준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형, 진짜 미안한데 나 그만둬야겠어요." 선배가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전후 상황을 얘기했더니 "정히 그러면 네 뜻대로 하라"고 한다. 내가 일주일만 버티면 3개월이 채워지고, 그러면 헤드헌팅 회사에 패널티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견디기 힘들었다. 회사에 나가서 H이사를 마주치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H이사에게 사표를 제출하니, 월말까지 다녀도 된단다. 원하면 휴가를 쓰고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월요일에 팀원들과 환송회를 잡아놨으니 그 날짜에 사표를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퇴사하겠다는 알림 메일을 사내 팀장들에게 보냈다. 말리는 사람없었다. (내가 언론사로 복귀할 거를 ) H이사가 내게 보낸 마지막 메일은 "옮기면 연락처 알려주고,  지내자" 내용이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은  아니냐며.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판단 가운데 하나가 H이사와 결별한 것이다. 그 뒤에 우연히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인지라 뉴스를 통해서 그의 소식을 듣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같은 계통, 다른 회사로 옮겨 승승장구하고 있다. 언론계로 돌아온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다.


H이사에게 한 마디만 건넨다.


"직원들은 당신의 성취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다. 더이상 사람을 부품 취급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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