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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Jan 20. 2022

친한 후배가 내 뒷통수를 벽돌로 내리치듯이...

100가지 단상|"사람한테 상처받고 사람한테 치유받는다"


4  이맘때 심한 내상을 입었다.   동안 친하게 지냈던 다른 언론사 후배 A  등에 칼을 꽂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A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사실을 아예 몰랐거나 아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다시 돌이켜봐도 끔찍하다. 어느 , 일회성 모임 때문에 만들어진 단톡방에 A 이런 요지의  글을 올렸다. 순화시키면 이렇다.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겠다. 마주치기 싫은 이한기가 참석하기 때문에. 명색이 언론사 편집국장을 두 번씩이나 했다는 사람이 후배 B에게 공짜 술을 셔틀시키고 슈킹한다.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참석하는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 양해해달라."


이 글은 A가 이 모임을 주선한 선배 C에게만 보내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C의 개인 카톡이 아니라 나도 들어가 있는 모임 단톡방에 잘못 올린 것이다. 실시간으로 이 내용을 본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우선 내게도 선배인 C에게 연락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고 증명할텐데, 저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서둘러 전했다.


나는 물론 A와 B와도 잘 아는 후배 D에게 이 사실을 곧장 알렸다. 슈킹 당한 피해자로 지목된 B에게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 A에게 크로스체크 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그들과 접촉하지 않을테니 객관적으로. 다만 이 사실관계는 B에게 확인해달라고 했다. 1) (당시 기준으로) 지난해 내가 아이들 저녁 사먹이라고 B에게 조건없이 내 돈 20만원을 준 사실이 있는지 2) 내게 건넨 공짜술이 몇 병이었고, 얼마였는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데는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B는 내가 아이들과 식사하라고 20만원을 준 사실은 맞고, 돈을 안 받고 술 선물을 한 적이 있지만 슈킹은 아니었고 그 액수도 내가 가족식사하라고 준 돈에는 미치치 못한다는 걸 D에게 확인해줬다. D가 이같은 사실을 나와 A에게 동시에 알렸다. 그리고 D는 내게 그래도 A와의 정이 있으니 그를 선처해달라고 부탁했다. A도 심하게 떨고 있다면서.


몇 시간 후 A가 내게 "선배에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죽을 죄를 졌다"는 사과 문자와 전화를 걸어왔다. 짧게만 통화하고 끊었다. 그러고나서 D를 통해 나와 다시 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나는 "지금은 A의 목소리도 듣기 싫고, 얼굴은 더더욱 보기 싫다"고 거절했다.   


정말 친한 후배가 영문도 모르게 퍽치기하듯 벽돌로 내 뒷통수를 가격한 사건이었다. 그 상처는 아주 오래 갔다. 지금도 온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간혹 이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심한 우울증과 자괴감과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그때마다 이 사람들을 모두 아는 친한 후배 E가 묵묵히 내 얘기를 들어줬고 내 소주잔을 채워줬다. 내가 부르면 E는 달려왔다. 너무도 분해서 E 앞에서 운 적도 여러 차례다.


내가 그때 실명을 공개하고, 이같은 사실을 페북 등에 알렸다면 아마도 A는 내가 아는 인간관계 안에서는 사람 취급받기 어려웠을 거다.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사건 발생 6개월, 아니 1년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꾹 참고 견뎠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고 지금도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 까닭은,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저 내 인간관계 목록에서 영구히 지워버려 투명인간 취급하는 게 내가 그에게 주는 최고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어떻게 느끼건 간에. 사건 당일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A는 그 이후 한 번도 내게 찾아오거나 전화·문자로도 사과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그의 바이라인이 적힌 기사를 보면 참 활자가 안쓰러워 보인다. 주인 잘 못 만나서 웬 개고생이냐.


수학여행 버스 안에서 아이들을 선동하며 학교를 비방하는 노가바를 불렀다면서, 종례 후 나를 교무실로 불러 뱀의 혓바닥처럼 내 몸을 위아래로 핥으면서 "니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서 그 모양이냐"고 힐난하며 때리던 고2 때 담임 이후로, 사람에게 받은 최악의 상처였다. 30년도 훨씬 지난 고교 때의 기억이 아직도 완전히 씻겨지지 않았는데, 4년 전 기억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희미해질까.  



끝까지 참으면

참다가 끝난다


어제 내가 페북에 올린 '펌글'이다. 때마침 페북 '과거의 오늘'에서 4년 전 이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게시글을 봤다. 난생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 소주 한 병을 까면서 속을 달랬던...


더이상 숨막히면서 억누르면서 살고 싶지 않다. 왜 피해자인 내가 온전히 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하나. 이렇게 그 사건의 얼개라도 페친들에게 하소연해야 내가 그 나쁜 기억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 짧아질 듯 하다. 이건 폭로가 아니라 넋두리다. 그래서 부탁한다. 내게 더 자세한 내용을 묻지 말아주길.


"사람한테 상처받고, 사람한테 치유받는다."


내가 항상 의지하는 이 말을 인간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곱씹는다. 실제 그렇다. 이런 내상만 쌓인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내가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나를 믿고 내게 아낌없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견뎌냈고, 앞으로도 견뎌낼 것이다. 정월대보름에 하늘 높이 연을 날리고, 그 연줄을 끊어 액운을 멀리 떠나보내듯 이 기억의 일부도 이렇게 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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