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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기 Oct 05. 2022

콩이 물과 소금과 하늘을 만나 어떻게 된장이 되는지..

책|김인선 유고집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김인선 글모음.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메디치, 2019).


<어떤 이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른 봄 첫 쑥을 뽑아 끓인 된장국이 왜 그리 입에 단지 알 수 있다면, 민들레 얼갈이가 왜 그렇게 혀에 붙는지 알 수 있다면, 뒤뜰에 갓 돋은 시금치와 뒷산 비탈의 골 잔뜩 난 두릅 새순과 앵무봉 산기슭의 고추순과 이름 모를 나물들이 내 오장에 부려놓는 환희를 알 수 있다면,


그걸 알 수 있다면, 나는 내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텐데.


오이가 어떻게 오이지로 변신하는지, 도토리가 어떻게 도토리묵으로 성육신하는지, 햇살이 옥수수에 어떻게 단맛을 들이는지, 잡초에 갇힌 고추에 어떻게 빨간 물을 들이는지 알 수 있다면, 염천을 견뎌낸 콩이 물과 소금과 하늘을 만나 어떻게 된장이 되는지, 어떻게 간장이 되는지 알 수 있다면,


그걸 알 수 있다면, 내가 왜 태어났는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텐데.


김인선 글모음.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메디치, 2019) 中에서


유고집이다. 말 그대로 그가 평소에 썼던 글을 사후에 지인과 유족이 모아서 펴낸 책이다. 메디치미디어(대표 김현종)에서 여행사진 공모에 당선된 선물로 세 권의 책을 보내준다고 해서 고른 책 가운데 하나다. 저자 소개를 보니, 만난 적도 알지도 못 했지만 대학 선배였다. 그는 한창기 선생이 발행한 잡지 <뿌리깊은나무>(<샘이깊은물> 전신) 기자로 몇 년 활동했다고.


뭔가 저자에 대해서 알고난 뒤 그의 글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맨 뒷부분 '해설'부터 봤다. 영화평론가인 친구 김대현이 쓴 글이다. 둘은 중학교 동창이다. "인선이를 추억하는 글을 쓸 사람이 나 말고는 없어, 은퇴 이후 이십여 년 만에 유일하게 남기는 글"이라고 했다. 읽어보니, 정말 김인선에 대해 알려줄 사람은 오로지 김대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인선의 글은, 굳이 독자를 의식하고, 나중에 책으로 펴낼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내면의 기록' 같은 느낌이다. 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 하고, 그의 독백이 내 귀에만 들리는 듯하다. 묘한 매력이 있다. 물론, 그가 읽는 이를 정해놓고 쓴 글이 아니기에 글마다 내게 와닿은 이해의 높낮이가 다르다. 그 가운데 다시한번 음미해보고 싶은 글 한 편을 기록해둔다.


#김인선 #유고집 #세상에서가장느린달팽이의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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