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9/朝日記
아침부터 일어나서 본 건 바로 옆에 걸려 있던 손목시계. 9시를 달려가던 8시 반을 넘긴 시간. 어젯밤은 새벽 1시쯤에 잤을 터, 그러나 도중에 깼나? 아무튼 아침, 코골이 소리랑 갈증에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지만 여전히 피곤하다.
폰을 보지 않으려고 했건만, 그래도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건 글을 쓴 것, 남긴 것의 통계를 확인하는 것. 아침부터 일어나면 그것부터 먼저 확인한다.
언제부턴가 일상이 되어서, 나도 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이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각을 하고 보니, 폰을 켜고 먼저 확인하는 게 글의 통계인 게 뭔가 조금 특별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겠지, 이것도 나르시시즘인 거겠지. 눈을 조금만 더 감고 얕게 웃은 채로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건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는 않은... 애초에 체념과 절망이 비슷하게 같이 쓰이나?
아직 잠에 덜 깬 건 확실하지만, 오늘은 통계만 보고 다른 걸 보지 않는 것 대신 글을 쓰고 있다. 아침 일기라고 볼 수 있겠지.
아까 창밖을 보았는데 하늘은 흐렸다. 조금은 탁한 흰색의 하늘. 겨울 하면 그런 차가운 하늘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겨울이 싫었었다. 그래서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항상 몸이 금방 식는 기질이 있지만(이런 걸 체질이라고 했지) 난 더위에도 취약하다. 그럼에도 겨울보단 여름이 좋았던 이유는 뭔가 예술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걸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게 "aesthetic"이라는 영단어였다.
aesthetic, 원래 뜻은 '미적인'이라는 형용사다. 확실히 '여름은 예술적인 분위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여름이 '미적이다'라는 말이 될 수 있겠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아니,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겨울보단 여름이 좋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겨울이 좋다는 것으로 점점 기울였다. 아마 멋대로 약을 끊은 뒤(고3이라는 이유로 야자까지 카페인을 마시고 싶었지만 약이랑 같이 먹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에 타지에서 적응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인지(안다. 이것 말고도 뭔가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공황 발작이 일어났다. 점점 몸은 신경쇠약의 길로 빠져나갔다. 여름이 되자마자 온몸이 아픈 것처럼 불편했다. 불쾌했다. 아픈 기억이 된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기억 덕분일까 겨울에도 예술적인 분위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여름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든 장마(梅雨, 츠유) 속 흐린 하늘에서 초목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심상. 나는 어쩌면 여름의 분위기를 좋아한 게 아니라 이미지를 좋아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겨울은 확실했다. 물론 이것 또한 이미지(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차가운 하늘 말고도, 겨울에는 꽤나 가치가 있는 계절이었다.
그런 아무것도 없이 탁한 흰색의 하늘이더라도 눈이 오면 신나고(봄에 피는 벚꽃보단 아니다. 여름에 빛나는 윤슬보단 아니지만.) 낮이 되면 분명한 햇빛이 든다. 그건 마치 절망 속 구원의 빛,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태양은 빛난다는 것을, 그 속에서 피는 꽃 또한 아름답게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잘 안 하는 행동이지만, 방금 지금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훑어보니 지리멸렬이랄까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지고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러나 나름 자연스럽게 글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말이 길수록 군말이 많아진다는 법칙은 깰 수가 없었다. 이것보다 더 긴 장문이 된 글을 보면 의식의 흐름을 넘어선 지리멸렬로 기울어지는 쪽으로 가버린다.
이 감정 또한 기록하고 싶고, 그 느낌 또한 기록하고 싶고, 저 감정 또한 기록하고 싶은 내 지나친 욕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 이런 게 자기해부적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이것도 나름 좋게 들은 평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군가의 얼굴, 눈을 똑바로 맞추며 보고 있었을 테지.) 조금 잦아진, 조금 더 잦아진 폐부의 부패는 남의 것. 나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