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적인, 너무 문예적인, 수필

의식의 흐름을 붙잡아서 쓴 수필

by 한월

그 어떤 글이라도 분명 배울 점은 있다고 보는 게 나의 신조. 심미주의자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에 있어서 윤리적 공감은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여기서 윤리적 공감은 그냥 공감이 아니라 '윤리적' 공감이다. 그렇다면 와일드는 어떤 의미에서 윤리적 공감이라는 용어를 썼던 것일까. 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오스카 와일드가 그런 말을 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예술에서의 윤리적 공감은 필요 없다고 말했던 시기는 근대의 서양을 배경으로 한다. 근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은 윤리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에서도 윤리를 강조했다. 즉, 예술에서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도, 근대 철학자인 칸트도 예술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간주했다. 하지만 와일드는 심미주의를 주장하면서 예술에 윤리는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한 윤리적 공감은 곧 윤리적 판단이 될 것이리라. 확실히, 그가 말한 것도 틀린 말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주장에 반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또, 윤리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셈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같은 무뢰파 작가들 중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어떻게 보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윤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비평이 아닌,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작품들이리라. 하지만 반 백 년 이상이 흐른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호평을 받고 있다. 물론 그들의 부도덕했던 삶과 신념 등으로 혹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작품과 작가는 별개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 어떠한 작품에도 작가의 신념, 철학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게 당연할 정도로 만연하다.

(나는 그리 각설하고) 어찌 됐든, 나는 나의 신조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글이든 분명 가치가 있다. 모든 글이 작품성과 예술성을 띠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왜냐하면 비문학 같은 경우에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배울 점은 있다. 여기서 '배우다'라는 단어는 나는 영작을 할 시 'study'가 아닌 'learn'을 사용하고 싶다. 'learn'은 '배우다'라는 뜻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무엇인가를 '알게 되다' 또는 '깨닫다'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모든 글로부터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acquir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자신이 필요한 것은 공감이나 위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정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essay)은 어떤가. 수필은 읽는 이, 즉 독자로 하여금 뜻밖의 교훈을 깨닫게 한다. 수필도 문학의 일종이지만 사실상 교육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경수필(輕隨筆)은) 누구나 쓸 수 있고 그만큼 누구나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특히 입시 체제에 맞춰져 있는 교육은 더욱이 그렇다. 작문을 할 때 수필을 쓰는 것은 도움이 될 지도 모르나 작문이 아닌 독해 능력을 기를 때에는 중수필(重隨筆)이 아닌 이상 수필은 독해 능력을 측정하는 데에 적절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는 수필은 경수필(輕隨筆)이다. 가벼울 경(輕)자를 쓴다고 해서 분위기가 전부 가볍지 않고 무거울 중(重)자를 쓴다고 해서 분위기가 무겁지 않다. 다루는 내용이 가볍고 무거운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리 구별한 것이다.

'슬픈 인간'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일본의 문인들이 집필한 수필들을 번역해서 엮은 책으로 책의 제목처럼 전부 우울한 생애를 보냈던 인간(작가)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수필들은 객관적인 정보를 주고자 하는 중수필이 아닌 글쓴이(화자)가 잘 드러나는 경수필이 대부분이다. 우울한 일생을 보냈던 그들의 수필 또한 분위기가 가볍지는 않으나(혹자는 그들의 일생에 비해서는 가볍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들의 일상에서의 생각과 감정이 드러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공감과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들의 신조, 신념, 관념, 관조는 그들의 작품(시나 소설 뿐만 아니라 수필을 포함해서)을 더욱 문예적으로 만든다.

사카구치 안고의 '문학의 고향'이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이 생각난다. 그들의 문학론, 문예론을 읽어본다면 정론은 아니겠지만 해답으로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덧붙여서, 나는 우울한 분위기와 퇴폐적인 분위기의 글들을 쓰고 또, 그런 글들을 많이 접해 왔다. 그렇기에 나는 괴로워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망과 슬픔에 이르게 할까 봐.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관심한 타인에게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은 민폐일 수도 있겠으나 관심을 가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되게 중립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도덕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심미주의자로서 예술에서 (윤리적인) 공감은 불필요하다는 와일드의 주장과는 달리 예술에는 공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나는 와일드의 말에도 동의하지만 톨스토이의 말에도 동의한다. 그 때문에 나는 중립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자 할 때도 최대한 겸손을 지키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진부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겸손은 본래의 뜻과 맞게 교만과 반대되는 말이지만 위선이나 기만이 아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믿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그렇기에 겸손도 적당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본질과 진실, 진심을 온전히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겸손을 '부리는 것'은 위선이나 기만이다. 작위나 가식 따위도 아니다. 작위와 가식이라는 말도 서로 비슷하지만 어떻게 보면 엄연히 다른 것이다. 작위는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일부러 그러한 것이지만 가식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버릇이 된 것이다. 습관이 아니다. 버릇이다. 도덕적이고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습관이고, 비도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버릇인 것이다. 어떤 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겸손이 위선이 되는 것이고, 작위가 가식이 되는 것이고 습관이 버릇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불교에서는 중도의 덕을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모든 글은 위대하지만 은밀하게 써지고 그래야만 한다. 그렇기에 모든 글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자질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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