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및 감상문, 작가의 일화 소개
"홀로 버티는 단식투쟁은 어마어마하게 꿋꿋하고 의연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 집단 단식투쟁이나 긴자대로 단식투쟁 따위는 가장 밑바닥 수준이다. 고독한 단식투쟁은 마음 깊은 곳에서 빛을 발하며 신비롭고도 의연하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높고 고독한 어느 영혼의 올곧은 운동이다. 속물들의 저속한 사회계약이 이 운동을 가로막는다. 그 접점에서 한순간 불길이 인다. 높고 고독한 영혼의 번민이 날카로운 통곡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심이 대가에 닿아 불길이 되며 형태를 상상하는 모습을 닮았다."
이런 생각에 그저 탄복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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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을 즐겨 읽다가 깨달은 것인데, 인간은 누가 자기를 좀 속여줬으면 하는 본능이 있다. 속아 넘어갈 때의 쾌감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술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본능 때문이며 엉터리 마을에 반항심을 느끼는 것도 그런 본능에서 온다. 그러니까 정교하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이 쾌감은 남녀관계에서도 엿보인다. 요부의 매력은 그녀에게 속아 넘어가는 남자가 느끼는 쾌감 탓에 성립되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 완벽하게 속아 넘어갈 때의 쾌감, 이 쾌감은 완전히 개인적인 비밀이어서, 만인에게는 명명백백한 거짓이어도 당사자만큼은 속아 넘어가는 묘미와 쾌감을 안다. 따라서 더욱더 고독하게, 깊은 관계에 빠져들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사이비 교주의 속임수가 남들이 보기엔 아무리 확연할지라도, 속아 넘어갔다는 데서 오는 쾌감은 개인의 특권이기에 더욱 사무치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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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무의미하고 흉악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의미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 시즈오카현 작은 마을에서는 열여덟 소녀가 마작할 돈이 필요해서 네 사람을 죽이고 겨우 천 엔을 훔쳤다.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는 이런 어리석은 일들이 전국에 만연한다. 전쟁으로 어리석은 세상의 풍조다.
똑같인 난세의 도둑이라도 이시카와 고에몬이 사랑받는 건 그가 가진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라 닌자로서의 기술 덕분이다. 뛰어난 닌자들은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 졸음이 오게 만들어 머리카락을 잘라 가는 장난은 치지만 언제든 사람을 잠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죽일 필요가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적진의 대장뿐인데 불행하게도 죽어야 하는 상대 앞에선 꼭 몸에 힘이 들어가고 요술이 안 통해서 다가갈 수가 없다.
인간의 공상에도 한계가 있다는 게 재밌다. 하늘을 나는 닌자도 만능은 불가능하다. 그 자제로 선(善)인 자만인 만능이 가능하다. 사탄이 만능이라면 악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에 필요한 구원이 사라지고 만다.
닌자 이야기가 만인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순수한 악'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이는 또한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갈 때 느끼는 쾌감과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인간이 모두 성인이 돼서 세상의 악이린 악이 모두 사라진다면 행복할 거라고 믿는 건, 차를 홀짝이며 수다를 떨 때나 가능한 공상이지 진지하게 논의할 것이 못 된다. 인간의 기쁨은 세속적이라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악이 사라지면 자연히 선도 사라진다. 인생은 물처럼 무색투명할 뿐, 진정한 대립이나 보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는 것만 못하다.
닌자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 이 커다란 풍류를 사람들은 잊은 듯하다.
너무 진지한 사람들은 진리 추구에 성급하다. 하지만 진리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 이 소중한 '풍류'를 잊고 살기에 세상이 살풍경해진다. 당장에 플랜카드를 들고 밀어붙이며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에게 절대행복이 찾아올 것처럼 말한다.
인간사회란 일방적으로 정돈해버리기 불가능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선악은 공존하며, 행불행은 공존한다. 생사가 공존하며,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인간이 죽지 않게 됐을 때, 인생도 지구도 끝장이다.
아무리 진지한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추구하며 성급하게 결론을 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주 진지한 사회개량주의자는 아주 진지한 살인범과 비슷한 부류다. 둘 다 올바른 판단력의 적이며, 멋스러운 풍류를 거스른다.
패전 후 일본은 어지러운 도적떼의 시대이기도 한 반면 대단히 진지한 사회개량가의 시대이기도 하기에, 다 함께 풍류를 상실한 시대이기도 하다.
내가 단식투쟁 선생으로부터 한 가닥 청량한 바람을 느낀 건 태평한 풍류의 마음을 맛볼 수 있게 해준 까닭이다. 나는 진지한 사회개량주의자에게는 눈꼽만큼도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단식투쟁 선생에게는 끓어오르는 친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도둑이 될 거면 이 정도 솜씨는 부려줬으면 한다. 어떤 일이든 솜씨가 중요하다. 일에서는 솜씨가 밑천이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이기도 하다.
좋은 솜씨에는 구원이 있다. 속아 넘어갈 때의 쾌감은 만인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은행 사건 범인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히라사와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솜씨 좋은 사람에 대한 동경에서 나온다. 경찰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인간에겐 그런 감정이 있고 풍류는 그런 곳에 뿌리내린다.
(후략)
<슬픈 인간> 중 <온천마을 엘레지> 중에서
사카구치 안고 (1906년~1955년)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타락론>과 <백치>가 있다. 여기서 <타락론>은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 본질은 타락하는 데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매우 지저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방안은 발로 비집고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정리가 안 되어 있고 더러웠다고 한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무뢰파 작가로서 나란히 언급되었지만 정작 그는 다자이 오사무의 친구였던 오다 사쿠노스케와 접점이 딱히 없었다. 그대신 단 카즈오라는 마지막 무뢰파 작가와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다자이 오사무도 단 카즈오와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의 수필, <온천마을 엘레지>에서 먼저 제목에 관해 살펴보자면, 엘레지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서정시의 일종으로 애도와 비탄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비가(悲歌), 애가(哀歌)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 저자인 사카구치 안고가 언어에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프랑스어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와 같은 희귀한 언어를 공부하는 데에 한때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사카구치 안고가 살고 있었던 온천마을에는 아타미 온천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동료 작가이자 친우인 다자이 오사무가 여기서 여성과의 동반 자살을 시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