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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월 Aug 18. 2024

[창작 장편 소설] 스즈에와 미치루 4

제3장: 한여름 밤의 꿈

어느덧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졸업반인 3학년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형편없는 성적으로는 대학에 가지 못할 것을 알고 아예 자포자기를 한 채 집안에만 틀어 박혀 지냈다. 상업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스즈에는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공장으로 취업이 보장되어 있어서 오히려 나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스즈에는 학교에서 전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고 그에 비해 나는 학교에서 사소하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고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오고 또한 병약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요컨대, 학교에 가봤자 남들에게 피해만 줄 뿐인 문제아이자 귀찮은 존재였다. 분명 담임도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내 이야기는 무기력하고 생명력이 없을 뿐더러 희망이란 보이지 않아 재미없으니 스즈에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스즈에는 3학년이 되자마자 공장으로 실습을 하러 갔다. 항상 밤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가 없었고 나 또한 최근에 부쩍 몸이 쇠약해져 열에 시달려 몸져 눕는 일이 허다해서 각자의 사정으로 만날 수 있어도 기회는 항상 날라가곤 했다. 내가 건강했어도 상황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3학년이 되면 정상적으로는 대입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스즈에와의 만남은 다가오는 신년을 위해 동네 신사에서 같이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나서 헤어진 이후로 가진 적은 없다. 

바깥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스즈에와 달리 나는 늘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니 할 거라곤 독서뿐이었다. 읽던 책을 또 읽기도 하고, 아버지가 어쩌다가 일본에 볼 일이 있을 때 일본의 유명한 문인의 책뿐이었다. 운이 좋으면 서양 작품도 감상할 수 있었는데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었다. 

예를 들면, “밤은 별이 많다. 별들은 파랗게 떨고 있다, 멀리서, 파랗게.”라고 쓸까?

밤하늘은 하늘에서 돌며 노래하는데,

나는 이 밤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중략)

그녀의 그 커다랗게 응시하는 눈망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문득 그녀가 없다는 생각. 문득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

황량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황량한 밤.


파블로 네루다-”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나는 이 시를 감상하면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은 만국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도 지금 스즈에와 함꼐 할 수 없는 슬픔이, 그리움이 내 가슴 속에서 사무치고 있다. 이 황량한 밤에 말이다!


*


미치루와 만나지 못한지 참 오래된 것 같다. 그도 그럴게 나는 3학년이 되고 나서 공장 실습을 나가느라 좀처럼 미치루와의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 매일 늦은 밤까지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엄청난 피로감에 뻗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샌가 유월달이 되었다. 봄을 고하고 여름의 녹엽이 무르 익을 무렵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장 실습을 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적절하게 하고 학교 교복을 수선해서 만든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공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온 것 같았다. 나는 일찍 온 만큼 어젯밤 잔업을 정리했고 기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되었다. 나는 밤에 조금이라도 일을 덜하기 위해서 점심을 거르고 계속해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해는 지고 있었고 다들 정신 없이 기계를 돌리고 부품들을 조립하고 있었다. 동료가 잠시 볼 일이 있다고 해서 일을 대신 도맡았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밤이 찾아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했을 때 하필이면 공장장이 들어서 핀잔을 주었다. 

“쉬지 말고 계속 일 해!”

“너희들은 기계야. 기계가 쉬면 공장은 어떻게 돌아가나?”

다급해진 나는 속도를 높여 부품을 조립하고 또 조립했다. 마지막으로 기계를 조작하기만 하면 끝인데 그 기계로 다가갈 때 다른 직원들이 소리 질렀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를 돌아 보았지만 시야는 땅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시야가 흐려졌다. 속으로 “얼른 괜찮다며 일어나야 될 텐데.”, “안 그러면 공장장한테 혼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며 갑자기 눈이 감겼다. 


*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다. 오른쪽 팔에 통증을 느낀 채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팔에는 붕대로 감겨져 깁스를 하고 있었다. 두통도 살짝 느껴져 머리를 매만지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옆에는 언니가 눈물을 흘린 채 침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고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폐를 끼쳐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언니를 불렀다. 

“언니······.”

언니는 풀린 눈으로 나를 몇 초 응시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나를 안았다. 나는 갑작스런 언니의 행동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령이야...!”

“응, 언니. 나 괜찮아.”

“그래, 괜찮아? 어디 더 불편한 곳은 없지? 언니가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응.”

그렇게 혼자 병실에 남겨진 나는 처음 고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미치루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치루를 생각하니 미치루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괜히 걱정이 되었다. 물론 자신이 그럴 처지는 못 된다지만 미치루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미치루가 그리웠다. 그동안 미치루는 이런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루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아프지만 아플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다. 나는 깁스를 한 오른쪽 팔을 보며 이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풀어야할지 고민했다. 


*


“다행히 아예 못 쓰게 된 것은 아니지만 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최소 반 년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각별한 주의를······.”

의사의 말이 마치 외계어 같았다. 웅웅 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일어난 사실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석 달의 입원 끝에 드디어 집에 갈 때가 되었을 때까지 깁스는 풀지 못했고 당연히 실습은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 오니 우편함에는 내게로 온 편지가 쌓여 있었다. 언제 보낸 것인지 모를 엽서까지 합치면 언니의 전공책 두께 쯤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편지와 엽서는 미치루에게서 온 편지였다. 답장을 기다렸을 미치루를 생각하니 조금 무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미치루가 먼저 편지를 보내오다니 생일 때 빼고는 없을 터였기에 기쁜 마음이 앞서 질러갔다. 나는 방에 그것들을 한 가득 가지고 와서 하나씩 하나씩 편지 봉투를 뜯어 보았다. 

안녕, 스즈에.

잘 지내지? 요즘 바빠서 잘 못 만나서 아쉬워.

답장 꼭 부탁해.

1941년 6월 29일

안녕, 스즈에.

장마라서 그런지 비가 많이 오네.

최근에 아버지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갖다 줘서 읽었는데 네가 생각났어.

너와 놀고 싶어.

1941년 7월 14일

스즈에, 답장을 못할 정도로 바쁜 거야?

굳이 답장해줄 필요는 없으니 안심해.

1941년 7월 16일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지?

사실 짐작 가는 건 없지만

일단 미안해...

1941년 7월 17일

아, 그렇지.

나 학교 그만 두었어.

최근에 열이 심하게 올라가서 많이 쓰러졌거든.

사실 올해 봄부터 그랬는데 말하지 못해서 뭔가 미안해.

1941년 7월 24일

죽을 때가 다 된 것 같아.

내년 봄에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스즈에,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1941년 8월 15일

오늘은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어.

늘 그렇지만 오늘 처음 일어나서 너에게 편지를 써.

스즈에 너는 잘 지내지?

1941년 9월 14일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

병문안 올 수 있으면 와.

주소는 추신으로 남겨둘게.

1941년 9월 30일

나 주치의한테 들었는데 나 이제 곧 얼마 안 남았대!

...는 장난이고 오늘은 멀쩡해.

내년 봄에 같이 수성못에 하나미 하러 가자.

1941년 10월 2일

정말 하나같이 미치루다운 편지들이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낼 수 있다니 미치루의 끈기와 근면함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몸 상태가 최악일 때는 보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미치루에게 답장을 하려고 책상의 서랍장을 뒤져 편지지와 연필을 찾았지만 오른손 잡이였던 나는 이래서야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왼손으로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었다. 병원에 있을 때 왼손을 사용하는 것을 습관으로 들여놔서 조금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삐뚤빼뚤하지만 나름 알아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답장 못해서 미안, 미치루.

사정이 좀 있어서 네가 편지를 보낸지도 몰랐어.

오른팔을 다쳐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데 양해 부탁할게.

1941년 10월 19일


*


결국 반 년이 지나도 깁스는 풀 수 없었다. 어느덧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치루를 볼 수 없었다. 내년 봄에 수성못에 같이 하나미를 하러 가자고 한 건 미치루 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날 수 없었다. 또한, 편지의 답장도 끊긴지 오래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자.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매일 미치루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건 다 미치루의 탓으로 돌려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미치루를 미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가 미치루를 사랑하고 있고 이 세상도, 신도 미치루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편지를 쓴 봉투를 들고 오랜만에 수성못을 찾았다. 혹시나 미치루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수성못은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소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미치루와 함꼐 했던 아주 특별한 장소였다. 

수성못의 외딴섬은 녹엽들로 덮여 새들의 밀림이 된지 오래였고 호수의 물은 햇볕에 반짝거렸다. 매미의 울음 소리가 시끄럽게 내 귓가를 적셨다. 불쾌할 정도의 더위였지만 상쾌한 바람이 물가를 타고 살며시 불어왔다. 나는 나답지 않게 자연을 느껴보기 위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매미 소리는 그저 배경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고 바람에 살랑이는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미치루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했다. 눈을 감았지만 보였다. 미치루가 말이다. 미치루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해맑게 웃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때, 한 백로가 배롱나무 가지 위에 살포시 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 백로는 홀연히 떠나가려는 듯했다. 나는 황급하게 그 백로를 뒤쫓았다. 마치 저 백로를 따라가야 될 것만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 나는 수성못의 산책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백로는 이상하게 물가로 가지 않았다. 마음 한 칸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로는 자유롭게 두 흰 날개를 뻗어서 공중을 날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살짝 오르락내리락 하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 풀잎의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희망에 가득 찬 냄새였다. 빛의 냄새가 있다면 이러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로를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한 정자 앞이었다. 숨이 하도 차서 땅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어 고개를 드니 내 또래쯤 돼 보이는 한 앳된 여인이 있었다. 까만 생머리에 길다란 원피스 자락으로 가련히 앉은 두 발을 가린 채 배롱나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자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여인은 자신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낌새였다. 하지만 하나도 서럽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를 할 수 있도록 하게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빛을 보게 한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여인은 듣지 못한 건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나는 결심한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치루...?”

그제서야 여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의 얼굴은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눈을 바라보니 긴 눈매와 삼백안,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미치루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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