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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월 Aug 18. 2024

아침 수필 1

2024년 8월 18일 일요일의 기록

어제는 정말 곤란한 일이 있었다. 연애 이야기는 그닥 공유하고 싶지 않다. 좋은 이야기든 안 좋은 이야기든 말해도 복선만 잔뜩 깔아놓고 싶다. 새벽 동안 실랑이를 하다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안 그래도 새벽은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시간대인데, 하면서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일본어 공부를 했는데 단어만 정리하고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은 움직여줘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부정적으로 쓸데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집에서 나왔을 때는 6시 4, 50분쯤이였나. 집앞에 바로 공원이 하나 있어서 거기를 7시 반까지 계속 돌았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신경 꺼버리고 잊고 싶은 기억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똑바로 꼿꼿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신념이나 다짐이 흔들릴 즈음에는 이렇게 무작정 운동을 하면서 땀을 흘리는 게 제일 좋다. 특히 이른 아침에 그렇게 하는 편이 가장 좋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 생각인데,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아침에 마신 커피나 운동을 하고, 얼음물을 마시고, 선선한 물로 샤워를 한 탓인지 개운해서 잠이 와야 하는데 아직도 긴장성 두통으로 승모근이 풀리지 않는다. 만성적인 것이라 스트레칭을 자주 해줘야 하는데, 깜빡깜빡한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안 했지만, 지금은 긴장해야 할 일이 넘쳐서 어쩔 수 없이 잊고 사는 게 문제다.


요즘에는 새로 산 책들이나 원래 가지고 있었던 책들을 타자기로 필사하는 게 취미이다. 타자기라고 할까, 그냥 컴퓨터 키보드지만 필사할 때만큼은 내 생각을 잊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어서 한결 편안해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최진영의 구의 증명,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알렉산드르 솔체니친의 암 병동,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그 외의 다른 소설책이나 시들도 한번 필사해본다. 노래 가사도 시의 일종이기에 한번 필사해본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중학교 시절에도, 고등학교 시절은··· 아무튼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문학 소녀라는 이미지를 간직해오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남의 글을 읽는 것 밖에 못했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내가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간에, 장르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손이 가는대로 글을 써내려 갔다. 대학생이 된 지금에는 필사와 이렇게 직접 일기를 쓰는 것 밖에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가끔 예전에 쓴 소설을 다시 업로드하거나 퇴고를 해본다.


소설은 막상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부끄럽고 수치심이 마구 든다. 그렇게 써놓고 두고 두고 후회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지나면 언젠가는 추억이 되고 그때는 이랬었지, 저랬었지, 그랬었지, 하며 한번 훑어보고 퇴고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긴 소설은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아서 금방 포기해버리는 심산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무기력해져서는 갑자기 다른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열등감 때문에 질투하게 된다. 그건 나한테 어떤 사람이든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데, 나는 대단하다고 밖에 말 못 해.', '저 사람은 신나게 놀기도 하는데, 나는 바라만 볼 수밖에 없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만다. 아직까지 나의 우울함과 트라우마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약을 먹어도 어차피 나의 태생적인 무엇인가가 작용해서 그런 것도 있기에 약에 의존하고 싶지 않고, 의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나는 치료를 위해서 약을 꾸준히 먹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약에 의존하지 말라고 걱정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준다. 참 고마운 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라도 영혼 없이 관심을 가져주는 게 나는 괜한 오지랖이라고 느껴진다. 예의 상 빈말을 하는 게 참 선을 긋는 느낌이 든다. 원래 그런 사이이면 모를까, 그런 사이까지는 아닌데 그런 빈말을 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위선이기 때문에 악하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든, 연인 사이든 위선은 있어선 안 된다. 아무리 사실이고 맞는 말이라고 해도 그건 냉정하고 현실주의, 리얼리즘을 밝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정반대로 너무나도 감정에 치우쳐져 있는 사람이다. 차라리 후자의 인간들보다 전자의 인간이 훨씬 편리하고 쓸모 있지만 너무나도 극과 극이다. 이런 게 싫어서 나는 글을 쓰게 된 것도 있다. 글을 쓰면 나의 생각을 객관화시키고 나의 줏대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중립국을 외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나도 되도록이면 중립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일이 올 것이다. 사회 생활을 하려면 역시 전자의 인간 군상이 되는 게 편하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이 독해지려고 한다.


늘 겸손을 잃지 않고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늘 잃지 않기를······.


+부속 메모: 24.08.18


아무리 노력해도 반드시 한계는 있을 것이기에 너무 힘을 빼지 않도록 주의하자.

악에 받쳐 살다간 죽도 밥도 안 될 테니.

연인도 사실은 남이니까 관심이 없는 부분도 분명 있는 것이겠지. 이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 건 나쁜 일이지만 슬프게도 남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 사람은 원래 듣고 싶은대로만 듣기에 말을 길게 하면 강조는커녕 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으로 느껴지게만 하더라. 다들 단순 명쾌하고 간결하고 더 확실한 문장을 원하니까. 내 문장은 틀려먹은 거야.

워낙 인간이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존재라고 해도 이것조차도 조절할 수 없다면 그건 기계라고 봐. 심지어 공감이라는 이해심조차 없다면 인간으로서 실격인 게 아닐까. 관심이 없으니 기억을 못 하는 것. 더 이상은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힘듦이 더욱이 사랑에 굶주리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무언가일까.

'그래, 그렇구나. 결국에 너는 그런 녀석이었구나.' _ 스이소우, <문학강의> 中에서


스이소우, <문학강의> 커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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