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기억
무심코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깬 까닭은 다름 아닌 더위 때문이었는데, 더위에 짓눌려 숨이 턱턱 막혔다. 선풍기를 틀고 잤음에도 나는 한여름 밤의 무더위에 나는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눈이 떠진 것이다. 바깥은 아직 어둠이다.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려면 족히 한 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다. 자기 전에는 에어컨을 무조건 끄는데, 그 이유는 우리 집의 에어컨은 에어컨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구식의 냉풍기다. 그레서 작동시키면 엄청난 소음과 함께 냉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또한, 전기세 걱정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꺼두고 대신에 선풍기를 트는 게 우리 집에서는 일상인데, 선풍기만으로도 가시지 않는 이 열대야는 적막함도 가시지 않는 듯하다. 마치 영원한 밤이 지속될 것만 같은, 마치 영원한 열대야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퍽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시간 때마다 눈이 떠지는 게 버릇이 되었다. 안 좋은 것은 버릇, 좋은 것은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다시 부정문이 붙는 것은 어디선가 경상도 특유의 말투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대구에 사는 나로서는 뭐 그런갑다 싶다. 어쨌든, 나는 새벽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눈을 뜨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것은 꽤나 만성적인데, 아마도 방학을 맞아 늦잠을 자는 게 버릇이 돼서 그런 듯하다. 나쁜 버릇이다.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할 따름이다. 하마터면 나는 이를 습관이라고 할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리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를 할 적에는 이런 밤 중이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사랑하고 싶은 밤이다."
이 말을 시작으로 무언가 더 적은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지만 뭐라고 적었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드에 적은 것 같은데 문서에는 내가 지워버렸는지 흔적조차 없다.
그러고 보니, 꿈을 꾸었는데 전남자친구가 나오는 꿈이었다. 그와 함께 다시 연애를 하는 꿈이었는데 나는 그 꿈을 꾸면서 너무나도 기분이 언짢았다. 역겨웠다. 현실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짓이었다. 나쁜 것은 -짓이라는 의존 명사를, 좋은 것은 -것이라는 의존 명사를 쓴다. 우리들은 흔히 몹쓸 짓이라고 쓰지 않는가. 그런 느낌이었다. 한 사람과의 사랑은 한번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짝사랑은 다르다. 짝사랑은 못다 이룬 연애다. 이것은 실패한 연애, 즉 실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짝사랑은 외사랑이라는 말과 치환할 수 있는데 어찌 보면 이 짝사랑이라는 말은 이상하다. 왜 하필이면 '짝'이라는 단어가 붙었을까. 여기에는 명사의 짝이 아니다. 짝- 이라는 접사이다. 본능적으로 접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확한 것이 중요하기에 사전을 찾아보니 '쌍을 이루지 못한' 또는 '쌍을 이루는 것과 조화되지 아니하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라고 한다. 그렇다면 짝사랑은 외사랑과 치환이 가능하다. 여기서 외는 한자가 아니다. 이것도 짝-과 마찬가지로 접사인 외-인데, '혼자인' 또는 '하나인' 또는 '한쪽에 치우진'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라고 한다. 둘 고르지 않은 모양이라는 뜻의 외(碨)라는 한자가 있지만 이 외자가 아니거니와 잘 쓰이지 않는다.
아무튼 짝사랑이나 외사랑은 다르다. 애초에, 연애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연애는 사전적 의미로도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뜻하는데, 무조건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다고 해서 전부 연애라고 할 수 없다. 문득 진부한 사랑 노래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짝사랑이나 외사랑은 진부한 사랑에 불과하다. 어리석은 짓임에도 우리는 미련과 욕망을 가진 인간이기에 짝사랑은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그가 생각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가슴이 시린 것을 느낀다. 추운 여름 밤이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나는 추위에 밤을 지새운다. 밖은 아직도 어둠이다. 이것은 오다 사쿠노스케의 '가을에 오는 것'이라는 수필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무리 더워도 제대로 유카타를 입고 책상 앞에 앉는데, 8월로 접어든 어느 새벽엔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무더위로 잠들기 힘든 밤의 고통을 그대로 꿈속으로 지니고 들어갈 때, 나는 싸늘한 밤 공기를 피부로 느낀다.
나도 그처럼 된 게 아닐까. 그가 말하던 시름을 앓고 있는, 무더위에 밤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근심이 들곤 하는 새벽이다.
사랑의 시를 찾으러 왔다면 유감인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