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령이와 영이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아직 령이와 영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즉, 우리가 스즈에와 미치루가 되기 전으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매미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서 시끄럽게 맴돌고 땡볕 아래서 그놈의 창씨개명인지 뭔지를 하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는데 기다리고 기다리고를 반복해서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앞에는 험상 궂게도 생긴 한 헌병과 서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 중에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라고 하자 나는 “영이예요.”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잘 못 들은 것인지 “네?” 하고 되물었다. 나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듯해서 옆에 딱 봐도 심히 얼굴이 굳어져 있는 헌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영이요, 영.”
그러자 여자는 그제서야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헌병은 나의 이런 태도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그저 더위를 먹어서 멍한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처음 내가 봤을 때 그 표정 그대로 있었다. 마치 햇볕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시멘트, 콘크리트와도 같았다. 아니, 저것은 이미 조각상이었다.
어찌 됐든 나는 찰 영(盈)이라고 대답하자 히라가나로 미치루(みちる)라고 적힌 종이를 들이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히라가나 한 자, 한 자를 읽어내어 나는 미치루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부터 미치루로서의 삶을 살아가겠구나. 그래봤자 내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내 뒤에서 앳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다 됐으면 비켜줄래?”
나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내 또래의 앳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머리카락은 나처럼 길지는 않고 단발에 긴 눈매에 눈동자가 작아 무심해 보이는 삼백안을 지닌 나와 다르게 애굣살이 있어서 더욱 앳되어 보이는 동그란 눈을 가진 한 소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하고 착해보이는데 할 말은 할 줄 아는 그런 애인가 보다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그녀를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뒤에서 또 그 서양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말귀를 못 알아 듣는 모양이었다.
“영이요?”
“아니요, 령이요.”
“네? 영이라고요?”
“령이요, 령.”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여자가 그제서야 영이 아니라 령이라는 것을 알아 듣고 마찬가지로 한자를 물으니 그 령이라는 소녀가 대답했다.
“방울 령(鈴)에 큰 내 강(江)이요.”
아, 령이 아니라 령강이라는 이름이었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신기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저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아이라서 도무지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무심코 저 아이는 어떤 이름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종이에다가 적고 있는 여자와 령강을 번갈아 가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여자가 령강에게 히라가나가 적힌 종이를 건네고 령강은 히라가나를 하나씩 소리 내어 읽었다.
“스, 즈, 에.”
그녀는 이제 스즈에(すずえ)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리라. 나는 약간 씁쓸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