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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Oct 08. 2022

임자헌의 『명,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2017)

물건에 마음을 담다

읽은 날 : 2018.3.24(토)~4.1(주)

쓴 날 : 2018.4.1(주)

면수 : 251쪽

* 4년 전 글을 다듬었습니다.

 

복직 첫해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으로 학기말 수업을 했습니다. 남자의 물건에서 본 차범근 감독의 계란 받침대(아이들과 아침 먹던 그때가 그리워), 저의 재산 목록 1호인 성경과 자전으로 운을 띄우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이면지에 쓰거나 그려 칠판에 붙이게 했습니다. 휴대폰이나 연예인 굿즈가 대부분이었지만 기타, 연필처럼 생각지 못한 답도 제법 있었습니다.

올해 스무 살 된 아이들의 열다섯 살 어느 날 발자국.

銘(명),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은 옛 선비들이 아끼는 물건 이야기입니다. '명'은 '새기다'는 뜻으로, 물건에 대한 생각이나 내력을 새겨 두는 한문 문체입니다. "사물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그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오래도록 기억하며 스스로를 거기에 비추어 반성한다는 것은 그 사물이 그만큼 익숙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늘 내 곁에 있어서 눈길과 손길이 닿으니 늘어나는 세월의 무게만큼 그 사물에 대한 생각도 깊어지는 것이다."(5~6쪽)


책에는 꽤 다양한 물건이 나옵니다. 붓, 먹, 종이, 연적처럼 선비에게 있어야 할 필기구와 베개, 이불, 부채 같은 생활용품이 가장 많습니다. 과자 그릇이나 안경처럼 색다른 물건도 종종 보입니다. 이규보부터 조긍섭까지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물건 주인의 마음은 하나. '물건으로 나를 가다듬기!' 그들은 오래된 물건에서 자신을 보며 젊은 날의 푸르름이 바래지 않게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명'이란 이름으로 꼼꼼히 남긴 글에서 옛사람의 깊이와 결기를 읽습니다.


자세히 보면 숨은 글을 찾아 요즘 생각과 감성으로 다듬은 안목이 돋보입니다. 여성 한문학자의 책이 드문 현실에서 임자헌 선생님 글은 반갑고 귀합니다. 맹랑 언니의 명랑 고전 탐닉군자를 버린 논어 재미있게 읽어 이번 책도 출간 전부터 한참 설렜습니다. 학자들의 명도 좋으나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은 평설에 더 많습니다. 내년에 복직하면 다시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으로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려 합니다. 이 책에서 보고 배운 생각들이 또다른 길이 되겠지.


<마음에 남 글>


내 주위의 모든 것에 '잠시 멈춤'의 불이 켜지자 소담함이 빚어내는 지혜가 반딧불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7쪽


너는 내 마음에 고여 있고 그렇게 고여 있는 너를 위해 아픈 줄도 무거운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받쳐 줄 것이다. 네가 행복하도록 네가 늘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 25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각각 다르게 맡고 있을 뿐이고, 각각의 분야는 모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아 하면서 우리가 만든 사회를 구멍 나거나 이지러지지 않게 운영해 가고 있다. 63쪽


청소하는 데도 예절이 필요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몸에 익어 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관계 맺는 자세와 방법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78쪽


무엇을 선택하든 그 분야를 넓고 깊게 해서 전문가가 되고, 그런 학문적 성장과 함께 자기 자신의 인격까지 성숙하게 가다듬는 것은 평생 노력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123쪽


왕은 나라의 울타리에서 소외되는 백성이 없게 살피며, 자기의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삶의 몫을 다하고 이 한세상을 살아가도록 덕을 베푸는 존재이다. 159쪽


모두가 배고프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옳음'이리라. 172쪽


종이는 도구와 생각이 만나는 광장이다. 175쪽


절제는 지금 사용하는 도구가 필요했던 원래 이유를 잊지 않게 해 준다. 180쪽


문명이 발달하면 순박함은 업신여김을 받는다. 투박하고 화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이 장현광은 순수를 귀하게 여기는 자세가 세상에 가져올 수 있는 유익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중략) 명품이 지고의 가치가 된 시대에 질동이 하나 끌어안고 순수의 깊이를 예찬하는 한 선비의 모습을 본다. 192쪽


썩은 나무의 가치는 아무나 찾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철하고 예리한 시선을 가진 장인을 만나야만 그 가치가 빛날 수 있다. 세상을 더 깊고 더 넓게 더 새롭게 보려고 공부해 온 지식인이 썩은 나무의 가치를 발견해 주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 그 시선을 얻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다. 197쪽


꿈꾸고 설계하고 실행하고 다듬고 익숙해져 가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이다. 212쪽


빗질은 작은 일이지만 마음을 관리하는 출발점이다. 큰일은 언제나 작은 일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결정되는 법이다. 216쪽


뻔해 보이는 것이 실은 전혀 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넘겨짚기보다 상대에게 자신의 깊이를 직접 드러낼 기회를 준다면 오히려 질문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239쪽


배움과 인품과 삶이 일치된 사람이 되려면 함께 있든 혼자 있든 누가 보든 안 보든 한결같아야 한다. 242쪽


시간을 제대로 살아 내고 풍성한 경험과 지혜로 어른이 된 사람에게 나이 듦이란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번 젊어 봤으면 됐다. 누구에게나 찬란했던 젊음은 있지만 누구나 지혜롭고 매력적인 늙음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젊음만이 아니라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늙음에 대해 성찰하는 세상이 되어 갔으면 좋겠다. 251쪽

40여 일만에 카페에서 책읽기. 순둥순둥 막내에게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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