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선생님 놀이

by 스마일한문샘

고1 겨울방학 즈음 거의 매일 빈 교실에 갔습니다. 보충수업 마치고 다른 친구들이 집에 가면 단과학원 갈 때까지 교실에서 공부했습니다. 주일 아니면 1월 1일, 학교 안 가는 날에도 등교했습니다. 본관 3층 끝자락 낭(朗)반은 이름처럼 밝고 햇빛이 잘 들었습니다. 세콤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을 교실 공부는 겨우내 마음을 틔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과 공부하고 책 읽는 틈틈이 선생님 놀이를 했습니다. 쑥스러움 많아 말을 아꼈지만 가을부터 아른아른 한문교사를 꿈꾸었습니다. 칠판에 한문교과서 본문을 옮겨 쓰고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듯 조곤조곤 설명하면 햇살 닮은 뿌듯함이 차올랐습니다. 5년 후 같은 공간에서 교생실습하는 순간, 그 겨울이 작은 꿈과 맞닿았습니다.


고2, 고3 지나면서 같은 반 친구들이 한문시험 공부할 때 종종 물어봅니다. 겨울방학에 교실에서 말하듯 친구들에게 답해 주다 보면 저의 언어로 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쉽고 자세하게, 친구들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려 애쓰면서 공부에 힘이 붙었습니다. 늘 한 문제씩 아깝게 놓치던 한문시험에서 처음으로 50점을 맞았습니다.


며칠 전 18과 '통용' 설명하다 축제 준비를 예로 드는데 말이 잘 안 나왔습니다.

"재능을 나눠 쓰는 거 아니에요?"

학생 말에 정신이 번쩍! 평소 페이스만큼은 아니지만 그 반 학생들 상황에 맞게 풀었습니다. 같은 단원도 학생들에 따라 달리 설명해야 할 때가 있는데, 더 쉽고 명쾌하게 담아내도록 아이들의 언어를 잘 읽어야겠습니다. 1993년에서 1994년으로 흐르는 겨울, 선생님 놀이하던 그 마음으로.

강원국, 『강원국의 진짜 공부』,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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