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Jun 11. 2021

자궁근종 수술 후기 #02 우당탕탕 산부인과 입원기


입원 당일.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여러 날을 보내며, 차라리 빨리 입원일이 다가오길 내심 바랬던 것 같다. 푹신하고 따스한 침대도, 귀여운 우리 강아지 빵나도 잠시 안녕이다.



7,000보를 넘게 걷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온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팔, 다리 제모를 하고 손톱, 발톱도 싹 정돈한 뒤 건조한 종아리와 팔에 바디로션도 살짝 발랐다. 수술대에서 종아리에 각질이 허옇게 일어나 있으면 몹시 창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신경 안 쓰셨겠지만 괜히 떨려서 안 하던 짓을 했다.


입원 당일 아침과 점심은 흰 죽으로 먹어야 하며 간장을 찍어먹는 것 외엔 다른 반찬은 먹을 수 없다. 입원 후엔 무조건 금식. 나는 엄마가 직접 쑤어주신 죽에 국간장을 살짝 찍어 먹었다. 야채들을 끓여 채수를 내어 죽을 만들어 주셨는데 약간 간이 배어 맛있었다. 역시 엄마 사랑이 최고이다.




두근거리는 공항에 머물다 먼 곳으로 떠날 생각에 들떠, 가스는 잘 잠그었는지 이불 정리는 잘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집을 돌아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기분 좋은 떨림이 아닌 두려움과 어색함, 걱정이 살짝 뒤섞인 기분. 기분 좋은 곳에 갈 때만 챙기던 캐리어에 입원 준비물을 담는 마음이라니. 내일이면 썬베드가 아닌 병상에 링거를 달고 누워있을 것이다.


입퇴원 시 편할 허리 밴딩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솜뭉치 같은 빵나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으니 남편이 도착했다. 꼭 여행 갈 때마다 회사일이 생겨서 반차를 내고도 살짝씩 늦더니, 이 날도 그랬다. 더욱더! 여행 가던 날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집에 돌아온 남편 역시 자신의 짐을 후다닥 챙겼다. 쓸 수건들, 입을 옷, 세면도구 정도. 남편도 입원부터 퇴원까지는 쭉 연차를 냈다. 남편, 잘해보자! 아니, 나 좀 잘 챙겨줘!


3시 30분 병원 도착. 접수하는 곳에서 보호자 식사와 환자 식사를 일반식/고급식 중에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1인실, 2인실 여부도 결정.





햇살이 따뜻하게 스미는 병실은 구석구석 전부 다 깨끗하고 포근했다. 보호자 침대도 푹신푹신. 화장실도 깨끗하고 바닥도 뜨끈뜨끈하니 수술 후 몸을 추스리기 참 좋아 보였다.






항생제 테스트가 꽤 아프다는 후기들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간호사님 말씀처럼 좀 기분 나쁜 따끔함 정도여서, 다음 일들도 생각보다 괜찮을 거란 희망과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용기가 동시에 생겼다.



입원 후 한 채혈, 항생제 테스트 모두 평소라면 질색팔색 할 일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비하면 간단하고 쉽고 아프지 않은 일이다. 

항생제 테스트 후엔 배꼽에서 중요부위까지 제모를 해주시는데 배의 솜털 같은 부분까지 싹 밀어주신다. 마른 제모라고 하셔서 그게 뭐냐고 여쭤봤더니 거품이나 크림 없이 하는 면도라고 하셨다. 그래서 좀 아플 수 있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배의 솜털을 밀어주실 땐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만 있어서 걱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털이 밀리고 난 뒤에서야, 입원 전에 깔끔히 왁싱하고 오지 못한 게 후회됐다. 수술을 위해 하는 제모라 그렇게 깔끔하고 완벽하고 예쁘게 제모 되질 않는다. 이건 마치 벌목을 하다 만 앙상한 겨울산, 혹은 넓은 잔디밭 가운데만 크게 대충 길을 닦아 낸 느낌이랄까. 수술 후 털 자라는 기간 동안엔 너무 따가워서 왁싱 생각을 50번도 넘게 한 것 같다. 털들이 자라는 느낌이 얌전한 사람을 거칠게 만든다.



입원하는 순간부터 수술 전까지, 물을 제외하곤 아무 음식도 먹을 수 없는 금식의 시작이다. (입원 시간이 4시를 넘었기에 식사 신청 시간도 지나서, 남편 식사는 내일부터 준비된다고 하셨다.)



햄버거를 먹으러 떠난 남편이 얼마나 부럽던지. 밀가루, 소고기, 감자튀김. 싹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앞으로 근종 재발 방지를 위해서 쭉 피해 줘야 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간호사님께서 건더기가 없는 음료는 12시 전까지 마실 수 있다고 하셔서, 남편이 사다준 콜드 오렌지 주스로 마음을 달랬다.






30분 내로 마시라고 말씀하신 게 떠올라 마크롤액을 쭉 들이켰다. 허기져서 더 한 번에 마셨는데 그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30분 동안 나눠 마셨어야 했는데..!




지금도 선명한 그 느낌. 울렁거리는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방이 지나치게 따뜻해서인가 싶어 창문을 살짝 열고 차가운 물을 마시며 병실을 걸어보았지만 울렁거림은 멈추지 않고 점점 심해지는 듯 했다. 관장약을 먹은 건데 몰아치는 대변 신호는 오지 않고 아주 일상적인 평범한 신호만 와서 대변을 한 번 보았다. 그 이후로도 울렁거림이 멈추지 않아 복도 의자에 머리를 짚고 앉아있다가 지나가시는 간호사님께 여쭤보니, 2시간 뒤에도 속이 안 좋으면 얘기해 달라고 말씀해주셨다. 30분 동안 천천히 마셨어야 했는데 너무 한 번에 마셨나.



세상에나. 공포영화에서 피를 뿜듯 분수처럼 토해본 건 난생처음이다. 몰아치는 토하는 소리는 공포영화의 좀비 떼 소리 같았고 남편이 놀라 화장실 문 앞까지 달려와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처참한 모습에 문을 얼른 걸어 잠그고 괜찮다는 말만 했다. 이렇게, 화장실 안에서 3번이나 토했다. 밖에서 주춤주춤 거리는 남편의 발걸음. 남편, 나 살아있어!



집이었으면 지쳐서 그대로 잤을 것이다. 털도 깎이고, 먹은 것도 없는데 토를 세 번이나 하고, 그렇다고 뭘 다시 먹을 수도 없는데 링거대는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운지. 이 병원은 오른손에 링거 주사를 놓아주시는데, 오른손을 많이 쓰면 피가 역류할 수 있으니 최대한 왼손을 사용하라고 당부하셨다. 이것도 정말 신경 쓰이고, 여러모로 벌써 지쳤다. 수술하기 싫다! 정말 싫다! 도망가고 싶다! 옆 건물에 있는 돼지갈비 맛집에서 돼지갈비나 왕창 뜯고 싶다!



다 토한 관장약은 어떻게 하냐고 여쭤보니, 정상이니 걱정하지 말고 새벽에 할 관장 때 잘하면 된다고 달래주셔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입원 첫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따뜻하고 건조한 병실에 가습기를 최대치로 틀어놓은 채 남편과 푹 자고 싶었지만- 간호사님들이 틈나는 대로 내 몸 상태를 체크하러 오시고,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될 항문 관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물론, 꿀잠을 부르는 푹신한 보호자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동반자도 마찬가지.


항생제 테스트, 제모, 관장. 이렇게 미션을 하나하나 클리어하며 수술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