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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먼바다'

'삶을 지탱하는 힘은 결국 사랑'

by 한나Kim

이 책은 사랑, 특히 누구에게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첫사랑'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쉽게 읽히고 공감도 잘 된다. 애틋한 첫사랑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살면서 아쉬움으로 미련이 남은 순간을 두고두고 회상하는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17살이었던 주인공 '미호'는, 천주교 모임에서 성직자를 꿈꾸는 3살 연상 '요셉'을 만나 존경심에 가까운 사랑에 빠진다. 미호가 19살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요셉은 신학도를 그만두고 군대를 다녀오겠다며 그동안 자신을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한다.


19살의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던 그의 계획, 그를 향한 사랑과 존경, 하나님으로부터 그를 빼앗는 듯한 죄책감까지.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버거운 선택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미호는 그로부터 도망친 지 4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때의 미련과 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다.


P18-19

그러나 40년이 지나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분명 있었다. 그날 그가 했던 말들, 칸막이가 높이 쳐져서 밖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않는 간이 룸이 줄지어 있던 어두운 레스토랑. 아직 여고생이던 그녀의 앞에 놓여 있던 맥주의 크림빛 거품들. ... 그리고 그 후로 오래도록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와 내가 살아 있는 한 한 번쯤은 그와 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러면 나는 묻게 될까? 그날 그게 무슨 뜻이었어요? 하고.



그로부터 도망친 후, 그녀는 번이나 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한 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현재 그녀는 독일어과 교수가 되었고, 그 사이 결혼도 하고, 딸도 하나 낳았다. 남편과는 이혼을 했다고 나오나 자세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다. 요셉은 한 여자랑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아이를 4명 낳고, 뉴욕에 살고 있다.


이미 4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미련과 의문을 품고 있던 미호는, 미국에서 열리는 '헤밍웨이 심포지엄'에 참석하게 되면서 그에게 연락을 한다. 그렇게 둘은 뉴욕에서 재회를 하게 된다.


...


이 책은 철저하게 미호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덕분에 그녀의 글에 쉽게 동화되며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안에는 '요셉'이라는 남성의 감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미호가 이야기하는 그는 성직자를 꿈꾸며,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감을 잘하는 사람으로, 냉철함과 책임감 그리고 부드러움을 가진 인물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감정이, 그의 상황이, 그리고 지난 40년 간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감성과 철학이 풍부한 男작가가 이 책을 남성의 시각으로 집필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분명 '냉정과 열정 사이'보다 더 다채롭고 깊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왜냐면 이들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젖어든 60대이고, 덧붙여 성직자를 꿈꾸던 그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하느님을 포기하게 된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사랑의 감정은 막을 수 없다'



책에서 요셉의 감정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헤밍웨이가 평생을 방황했던 이유를 말하는 부분에서 약간이나마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P87-88

"왜 헤밍웨이가 전장에 나가 다쳤는데 연상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잖아. 그런데 그녀는 그를 가벼운 연애 상대로 여겼고 그의 진실한 사랑을 믿지 않았지. 격분한 헤밍웨이는 어느 날 배신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어... 나중에는 그녀가 미국 중서부 헤밍웨이네 집으로 그를 찾아오는데 그가 거절하지. 그는 이미 너무 상처 입은 후여서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이야기. 영화 해설을 보니까 헤밍웨이가 그녀에 대한 상처로 평생을 방황했다고 하는 걸 읽었어."

그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냥 헤밍웨이가 여자들하고 바람피우며 자꾸 이혼하고 결혼하려니까 핑곗거리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요?"


...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지난날에 대한 미련과 내 안에 살아있는 사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미련이란 놈이 과거의 기억을 왜곡시켜 삶의 큰 힘이 되기도 하고, 또 현실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상의 도피처'를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공지영 작가가 꿈꿨던 사랑이 아마 이와 같았으리. 사실 그녀뿐 아니라 여자라면 누구나 '미호와 요셉'의 사랑을 꿈꿀 것이다. 너무나 순수해서 놓쳐버린, 때문에 잊히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는, 그런 풋풋한 사랑 말이다. 덕분에 40년이란 세월이 지나도 그들은 여전히 싱그럽다.



조금 솔직히 말하면, 40년 전 그들의 사랑이 미완성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만약 그때 둘의 사랑이 완성되었더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실 부부와 다를 바가 없겠지.


다시 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사랑은 결국 '미완성된 사랑' 아닐까. 미련이 남기에 쉽게 잊히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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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