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아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아름다웠던 첫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둘이 상쾌하게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유리드와 로버트는 이미 부지런하게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 말린 오트밀과 플레인 요거트 그리고 신선한 과일을 넣고 섞어서 먹는 아주 건강하면서도 고소한 독일식 무슬리였다. 미국에서도 살았고, 영국에서도 살았던 나이지만 이런 식으로 먹는 무슬리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건강하고 맛있네~ 뭔가 독일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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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면서 참으로 많은 독일인을 만났다. 사실 독일 사람들은 그리 상냥하거나, 유머러스하지 않아서 친해지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심지어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어떤 이는 독일인은 늘 자기들끼리만 다닌다며 불만을 이야기한 경우도 있었다. 반면, 나는 신기하게도 어딜 가나 그들과 어울렸다.
2000년 네팔에 봉사를 하러 갔을 때, 태권도를 엄청 좋아하던 독일 소녀랑 같이 다녔던 기억이 난다. 키가 작고 예뻤던 그녀는 그때 내가 심지어 영어를 거의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렸다가 둘이 강에 목욕을 하러 가기도 했고, 또 내 앞에서 태권도를 보여주며 어설프게 한국어를 하기도 했다 "돌려촤기~ 앞촤기~ 옆촤기~"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녀가 고마웠기에 아직도 좋은 느낌이 남아있다.
2001년 호주에 갔을 때에도 키가 180Cm 정도 되고 샤론스톤처럼 생겼던 독일 여인이 나한테 바에 가자고 한 적이 있다. 그녀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녔지만 영어를 정말 못했기에 유럽인은 모두 영어를 잘할 거라는 편견을 깨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독일인과 어울리며 여행을 다녔다. 심지어 멕시코시티에서 5박 6일을 여행할 때에도 동갑인 독일 여자애랑 같이 다녔다. 사실 그녀와 함께 오하까에 가기로 했었는데, 그때 당시 오하까에서 큰 데모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가기 하루 전날 그녀는 못 가겠다고 포기했다. 그래서 혼자 가게 된 것이다.
독일인은 꾸밈이 없다. 그래서 투박하지만 고소한 무슬리 같다.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매우 건강한, 그렇지만 화학적인 맛이 전혀 가미되지 않아 심심한, 딱 그런 느낌이다. 억지웃음도 없고,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는 없지만 한결같은 구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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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유리드, 로버트는 환상의 조합으로 3명 모두 독일인 특유의 차가움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말을 걸고, 심지어 산마을에서 머물 때에는 어떤 아줌마랑 친해져서 그 아주머니 집에 초대를 받아 점심을 먹기도 했다. 나도 함께 갔지만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기에, 그들의 대화에 방해가 될까 싶어, 혼자 나와 그 집의 아이들과 놀았다. 나는 아이들이랑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더라도 아주 즐겁게 놀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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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슬리를 먹은 후, 망망대해를 구경하기 위해 배 한 척을 빌렸다. 요하네스, 유리드, 로버트, 나, 이렇게 4명과 현지인 2명(선원 1명과 가이드 1명)이 함께 탔다.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거친 파도 위를 마구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넓디넓은 바다 위를 달리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자연은 늘 옳고, 항상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현지 가이드가 갑자비 바다 위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버버 하고 있었는데 그가 큰 바다거북이의 목에 헤드롹을 걸고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ㅇ_ㅇ 어머낫!
그걸 본 순간 3명은 즉시 바다로 뛰어들어 거북이를 만졌다. 도대체 구명조끼도 없이 저 끝없이 깊은 바닷속으로 어찌 뛰어들 수가 있을까. 다들 나한테 어서 들어오라고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수영을 못하냐고도 물어봤다. "당연히 할 수 있지.. 근데 수영장처럼 발이 닿아야 들어가지.. 저 깊은 곳에 어찌 풍덩 들어가뉘.. 나는 무서워서 몬간다ㅠㅠ"
옆에 있던 가이드가 구명조끼를 줬다. 사실 그걸 입어도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바다 밑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상어라도 있으면 어쩌나. 큰 문어가 있을지도 모르고ㅜ 그래도 용기를 내야지.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인 기회일 테니!
뭐, 마음 같아서는 멋지게 뛰어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쭈구리가 되어 어설프게 물속으로 스믈스믈 기어들어갔다. 가서 거북이를 만져는 봤는데, 음.. 그 촉감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이 정도의 거북이라면 한 100살 정도 됐으려나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바다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배를 타는 것도, 바다를 달리는 것도 좋았고, 거북이와 마주친 것 또한 엄청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 나와 우리는 과카몰리로 허기를 채웠다. 멕시코에서 처음 먹어본 과카몰리. 세상에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이날은 바다에서 너무 신나게 놀아서 그랬는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둘 다 바로 곯아떨어졌다. 피곤하니 로맨틱이고 뭐고 없다. 바로 꿀잠 모드!
다음날 오전, 나와 요하네스는 멕시코시티로 돌아가야 했기에 우리 넷은 아침을 먹은 후, 해먹에 누워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평화롭던 그때였다. 요하네스가 누워있던 해먹이 우지끈하고 무너졌다. 그걸 본 초코라테 아저씨의 슬픈 얼굴이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아저씨 쏘리.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쓰는 동안 두 번 놀랐다. 하나는 그때의 일이 생각보다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행의 순서가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내 기억이 틀릴 수 있음을 늘 상기해야겠다.
그날 늦은 오후, 그렇지만 아직 밝았던 그때, 우리는 멕시코시티로 가는 버스에 타고 있었고, 유리드와 로버트는 멕시코 남부로 더 여행할 계획이었기에 버스 밖에 서 있었다. 창문을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버스가 출발하자 서로에게 손을 흔들면서 헤어졌다.
그리고 그때, 요하네스에게 물었다.
"저 커플은 왜 결혼을 안 해?"
"독일은 결혼을 안 하는 분위기야. 그냥 동거만 하는 거지."
"나는 꼭 결혼할 거야. 그리고 아직 아프리카는 안 가봤는데, 아프리카는 꼭 내 미래의 남편이랑 갈 거야."
"(한쪽 눈썹을 올리고 묘하게 웃으며) 나도. 나도 결혼은 꼭 할 거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대화였다. 정말 별 의미 없이 유리드와 로버트를 보면서 했던 대화. 그래서 두 번 다시 생각나지 않았던 아주 평범했던 대화였다. 그런데 2년 뒤, 싱가포르 공항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왜 이 장면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그때 이 장면이 불현듯 상기되며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요하네스가 내 미래의 남편일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사실 우리의 무의식 또는 참 자아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이성보다는 본능의 소리에 집중하는 게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 내가 나의 무의식이 한 말을 믿었더라면 그 많은 드라마는 없었을 테지. 안타깝게도 나는 그를 의심했고, 또 의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