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셜 테니스 클럽 입성'
지난 2월부터 1:1 테니스 레슨을 받고 있다. 애들 방학 때나 비 올 때 빼고는 꾸준히 해와서 그런지, 그래도 처음보다는 공 감각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코치도 내 랠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말하며, 이제는 둥이랑 쳐도 재미있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랑 둥이는 같은 코치한테 배우고 있다.
둥이랑 칠 때도 이렇게 쳐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렇지 않다. 코치랑은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내 앞으로 공을 딱딱 보내줘서 그런 건지, 혹은 그의 무한 칭찬 때문인지, 어쨌든 랠리가 편안하게 잘 되는 편이나, 둥이랑 칠 때면 그들의 놀림에 눌려 그런 건지 다시 왕초보가 되어버린다ㅠ
이 말을 요하네스한테 했더니, "이제는 테니스 소셜 클럽에 들어가서 그룹으로 칠 때가 왔구먼!"라고 말하며, 저번 주 토요일에 나를 '기초반 그룹 테니스 소셜 클럽'에 끌고 갔다.
수업에는 필리핀계 여성이 한 분이 계셨다. 원래는 4~6명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날은 시범 수업이라 그런지 나랑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테니스를 친 지는 꽤 오래됐지만 늘 하다가 안 하다가를 반복해서 실력은 초보라고 했다.
그동안 테니스가 아주 편안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던 나였다. 1:1 코치인 L은 나를 뛰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50분 수업 중에 10~15분은 잡담을 한다. 때문에 지난 2월부터 그와 테니스를 치면서 땀을 흘린 적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그룹 테니스 수업'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네. 그룹 코치인 W는 공을 내 앞으로 보내는 배려 따윈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한 번, 나에게 한 번 흩뿌리듯 공을 던져대며 "뛰어!"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다.
공을 치기 위해 달려 나간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수백 번. 이렇게 하다 보니 내가 나뭇가지를 주워오는 강아지가 된 듯한 느낌이다. 나는 지금 사람인가, 강아지인가.. ㅠㅠ
게다가 1초도 쉬지 않는다. W코치, 거의 볼 던지기 머신이다. 어찌 저리 쉼 없이 공을 던져준단 말인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개처럼 쉬지 않고 공을 잡기 위해 움직였더니 20분이 지나자 정신이 혼미해진다. 옆에 그녀도 나와 같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쉬자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ㅠ
이렇게 30분이 지나자 나의 분노 게이지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다. 마음속으로 코치 욕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 코치 미친 거 아냐? 아니 어째 1초도 안 쉬고 이리 뺑뺑이를 돌릴 수가 있어? 어머 나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봐!!' 그렇게 또 10분이 지나자 이제는 눈빛 레이저로 그를 향해 욕을 해댄다. 내 눈에서 분명 빨간빛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뺑뺑이를 돌리다가 그가 돌연, 서브 연습을 하자고 한다. 나랑 필리핀 여인은 이제 서브를 연습한다. 공을 높이 머리 위로 던져서 라켓의 가운데 보다 약간 윗부분으로 맞춰야 한단다. 둘의 서브가 마음에 안 드는지 , 그가 라켓을 내려놓고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해보란다. 이번엔 야구 선수가 된 느낌이다. 군말 없이 최선을 다해 공을 던져보았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다 ㅠ
40분이 되자, 분노 게이지가 이제는 목까지 찼다. 혼자 씩씩 거리다가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올 지경. 진짜 쌍욕이 나올 것 같아서 잠시 물을 마시고 오겠다며 코트 밖으로 나간다. 그때도 필리핀녀는 요지부동 열심히다. 요하네스가 있는 벤치 쪽으로 걸어가며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면서 나지막이 욕을 한다.
"죽을 거 같아. 저 코치가 지금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게 분명해. 미쳤어. 1초도 쉬질 않아. 나 속으로 계속 욕하면서 쳤어. 그래도 10분만 남았으니 끝까지 해야겠지. 엉엉. 한국인의 깡으로 버텨보겠다. 갔다 올게"
다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코트로 돌아간다.
필리핀 여인과 W코치는 환상의 조합이다. 둘이 신나게 서브 연습을 하고 있다. 다시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연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2분을 더 했나? 갑자기 눈앞에 색이 싹 없어지며 모든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이네? 어머, 나 기절할 거 같은데? 그러더니 눈에 포커스가 나가기 시작.
ㅇ_ㅇ 헉
결국 "미안한데, 나 지금 기절할 거 같아. 눈앞이 하얗게 보여. 오늘은 그만할게"라고 말하고 깔끔하게 포기했다는 게 저번 주 토요일의 이야기이다.
요하네스가 벤치로 돌아온 나를 본 후 딱 한마디를 했다. "그동안 L 코치랑 했던 테니스는 가짜였어. 이게 진짜야. 땀이 나야지. 땀이!"
이런 게 테니스라면 저는 치고 싶지 않습니다ㅜ
그리고 이번 주 1:1 수업에서 L 코치한테 지난 토요일에 있던 그룹 수업의 이야기를 했다.
"W 코치가 장난이 아니었어. 어찌 1초도 쉬지 않고 계속 공을 던질 수 있어? 그래서 나 토요일에 진짜 기절할 뻔했어. 눈앞에 색이 없어지면서 초점이 나갔다니까"
이 말을 들은 L 코치의 얼굴이 꽤 진지해지며 이제는 서브 연습을 하자고 한다. 둘이 아는 사이라는데, 괜히 둘이 경쟁적으로 나를 더 굴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괜히 말했나?
...
어제 있었던 그룹 테니스 클럽에 내가 안 갔을까? 당연히 갔다. 힘들어도 이제는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제는 4명이 있었기에 저번 주처럼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어제 왔던 사람들은 사라포바처럼 생겼던 20대 여 E, 왕년에 테니스를 좀 치다가 20년이 지나 다시 시작한다는 60대 중반 할머니 M, 어제 처음으로 테니스를 쳐본다는 근육 빵빵맨 30대 초반 남 R, 그리고 나였다.
근육맨은 생애 첫 테니스였는데, 공을 뻥뻥 날린다. 나중에 그가 나랑 치는 게 답답했는지 '라켓 중간으로 공을 쳐야 잘 나간다, 라켓의 방향을 움직이지 마라' 등 막 코치를 해준다. 그걸 본 둥이는 박장대소하며 초보한테 배우는 엄마 안습이라고 소리를 친다. ㅠㅠ
60대 할머니는 싱글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계속 말을 시킨다. 결국 둥이의 나이, 이름, 남편의 국적, 우리가 왜 뉴질랜드에 왔는지, 언제 왔는지, 언제 가는지, 뉴질랜드 생활은 어떤지, 자기는 무슨 일을 했는지, 자기 강아지 이름이 뭔지, 자기가 어떤 수술을 했는지, 자기 엉덩이 뼈가 부러져서 테니스를 그만둔 이야기, 자기 발목이 부러져서 집에서 목발 생활을 몇 개월간 했던 이야기 등... 그녀와 이야기를 하느라 거의 테니스를 못 쳤다. 결국 W 코치가 우리에게 소리친다. 이제 그만 잡담하고 공을 주우라고 ㅎㅎ
...
총체적 난국인 소셜 테니스 클럽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나는 즐겁게 지낼 것이다. 지금처럼 쉬엄쉬엄 계속 치다 보면 언젠간 잘하는 날이 오겄지.
PS. 독일에서 시누이와 그녀의 두 아들, 그리고 그녀의 베프가 어제 크라이스트처치로 들어왔다. 앞으로 2주간 남섬을 함께 여행할 예정이라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