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의사였던 J양.

'영어를 못하면 의사도 바보가 되는 세상.'

by 한나Kim

컨버세이션 클럽에서, 콜롬비아인 J양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뉴질랜드에 온 목적은 단 하나, 16살•10살•7살인 아들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허나 뉴질랜드에서 자식 3명을 학교에 보내는 비용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이 대학교 석사 과정을 신청했다고 한다. *뉴질랜드는 '전공에 따라 다르지만' 부모 중 한 명이 대학원을 다니면 아이들은 무료로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배우자에게는 워킹비자가 주어진다. 처음 본 그녀였지만 경청을 극도로 잘하고, 굉장히 잘 웃는 사람이라 뭔가 오래된 친구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몇 주 뒤에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그날은 콜롬비아 J양과 나, 그리고 모임을 이끄는 ‘키위녀’ M쌤, 이렇게 세 명만 참가를 했다. 덕분에 두 시간 동안 아줌마들 수다 떨듯이 온갖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때 J양이 자기는 치과의사라는 이야기를 했다.


"뭐? 너 덴티스트라고? ㅇ_ㅇ"

내가 놀란 이유는 그녀의 성격이 지나치게 애교만점으로 귀여웠고, 무엇보다 진솔하고 인간적인 데다, 그저 평범한 애엄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랑 다를 바가 없는 그냥 지나가는 행인 같았달까. 그런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콜롬비아에 있을 때는 아이들과 하루에 네 시간 이상 함께 있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나의 리액션에 웃으면서 자기는 치주과/교정과/보철과 등을 아우르는 대형 치과를 운영하던 덴티스트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활짝 웃는데,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뭐랄까. 입은 웃는데 눈은 우는 느낌. 둘이 손을 맞잡고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너무 웃겨!

ㅎㅏㅎㅏㅎㅏ


.....


그녀가 작년 초 뉴질랜드에 왔을 때에는 영어를 정말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난 10개월 간 온갖 영어수업을 다니며 공부를 했기에, 지금 정도의 의사소통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영어를 공부한 지 약 5개월이 되자 문득 일이 하고 싶어 지더란다. 그러나 여전히 치과 의사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기 때문에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하여 그녀는 방사선과만 운영하는 큰 병원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곳에서 일을 막 시키더란다. 무거운 거 들게 하고, 바닥 쓸게 하고. 쓰레기통 버리게 하고, 빨래시키고.. 그래도 자기가 치과의사인데 하는 생각에 기분이 안 좋아서 며칠 다니다가 그만뒀다고 한다.


병원 일을 그만둔 후 여전히 영어공부만 하던 어느 날,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또 들더란다. 그래서 모든 자존심을 접고, 아예 청소하는 일에 이력서를 보냈다고 한다. 엄청난 심경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청소 자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청소 일을 하려면 발을 보호할 수 있는 알루미늄 보호 신발을 신어야 한다며, 그걸 당장 사 오라고 하더란다.


'내가 지금 청소일을 하겠다는데, 보호신발도 내 돈으로 사야 하는 거야?'라는 자괴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고. 그녀는 사가지고 오겠다고 말한 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ㅎㅎ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뭐랄까, 영어권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전우애 같은 거랄까. 나야 그렇다 쳐도, 평생 공부만 했을 너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니! 젠장. 영어를 못하는 자, 이곳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 ㅎㅎㅎ

우리가 왜 이리 깔깔 웃는지 어리둥절해하는 키위쌤에게 한 마디를 해줬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모를 거야. 너희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지. 만약 네가 한국어를 모른 채 한국에 온다고 해도 어쨌든 너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걸. 반면 콜롬비아에서 치과의사였으면 뭐 해? 영어 못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인데 ㅎㅎ 너무 웃기지 않니? ㅋㅋㅋ "



콜롬비아에서 늘 떵떵거리며 살았을 J양에게 지금의 상황은 꽤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그녀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시각도, 가치관도, 삶도 아마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J양은 결코 지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희극으로 바꿀 줄 아는 유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


'어진 마음의 시선' 작가님의 글에서 뭔가 J양의 상황을 표현한 듯한 시를 봤기에 공유하고 싶다.


<친절>


친절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기 전에

그대는 모든 것을 잃어 봐야 한다.

묽은 죽에 소금이 녹아버리듯

한 순간에 녹아버리는 미래를 느껴 봐야 한다.

그대가 손안에 쥐고 있는 것,

숫자를 세며 애써 모았던 것,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봐야 한다

친절의 영역 사이에서

그때의 광경은 얼마나 황량할까.


어찌하여 그대는 달리고 또 달리는가.

버스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승객들은 옥수수와 닭고기를 먹으며

영원히 창 밖을 응시한다.


...


친절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음을 알기 전에

그대는 또 다른 가장 깊은 것이 슬픔임을 알아야 한다.

슬픔에 잠겨 깨어나 봐야 한다.

그대의 목소리가 모든 슬픔의 실 가닥을 잡고

그 옷감의 크기를 알 때까지

슬픔과 이야기해 봐야 한다.


...


- 나오미 시합 나이(Naomi Shihab Nye)


시 전체를 보고 싶은 분은 아래를 방문해 주세요.

https://brunch.co.kr/@wisdomforall/256



가끔은 나만의 안전지대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참모습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진정한 친절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위의 시처럼,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마주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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