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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Kim Nov 16. 2021

방랑 벽의 끝, 결혼 (12)

'풍전등화 같은 인생. 사랑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내 여자 친구가 되어 줄래?"라는 그의 물음에 나의 답변은,

"일단 싱가포르로 와. 그게 가능하다면 생각해볼게."였다.


사랑에 극 소극적인 나에게, 이것이 나의 최상의 방법이자 답변이었다.


그는 "노력해볼게."로 답했다. 이 얼마나 허세가 1도 없는 솔직한 답변인가.. 그의 답변이 뭔가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조건 온다고 해야지 무슨 노력이야.라는 서운함도 살짝 들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냥 '약간의 서운함'과 '온다고 하고 못 오는 것보다야 낫지'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에게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이야기 한 그날로부터 그는 매일 밤, 내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그렇게 전화로 그리고 이메일로 서로의 감정을 교류했다. 신기하게도 그는 몇 시간을 통화해도 말이 끊기는 법이 없었다. 청산유수다. 이리 말을 잘하니, 얕은 대화를 잘 못하는 나에게 그는 참 편안한 상대였다. 허나 반전이 있다. 그는 결혼한 지 1~2년 후부터 지금까지 그다지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기는 사실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때 무지하게 노력을 했었다는 고백과 함께 그의 입은 현재 닫혀있는 중이다. .


데이트하는 여성들이여, 지금 보이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평생 갈 거라는 착각을 버리자. 그리고 그가 지금 그대를 위해 무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별다를 것 없는 어느 날 저녁, 역시나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년 2월에 8주 동안 싱가포르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얼마 전에 교환학생을 신청했거든. 아직 답변은 못 받았지만, 거의 될 거 같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이 고마웠고, 또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진짜 내 참사랑이 될 수도 있을 듯~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이던 그 시기에. 그저 들뜬 마음으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려야 될 그 아름다운 시기에,


어머나. '리먼 브라더스 사태'터졌다.

2008년 9월이었다. ㅠ_ㅠ


싱가포르는 정말 작은 나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일에 굉장히 유동적이다. 리먼 사태가 나자마자 몇 주일만에 집값이 거의 반값으로 떨어졌다. 아는 언니가 4억 넘게 주고 산 집이 2억대로 떨어졌다며 망연자실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뿐이 아니다. 150명이 넘던 우리 회사는 4주에 걸쳐 80명을 잘랐다.. 매주 금요일마다 퇴출될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댔다. 또한 각 팀마다 경쟁을 하여 Profit이 가장 낮은 사람이 나가는 구조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졌던 일이 모두에게 오픈되어 다른 팀에서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먼저 찾는 놈이 임자인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세상. 평화로웠던 인간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피도 눈물도 없는 동물의 왕국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경쟁을 극도로 싫어하는 원래의 나라면 그냥 홀가분하게 "내가 나갈게요~ 우리 팀 언니들 편하게 지내세요!" 했을 테다. 하지만. 나에게는 복병이 있었다. 로버트가 내년 2월에 나를 보기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한다는 사실 ㅠ_ㅠ 그때까지 어쨌든 안정적인 월급과 합법적인 비자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 그분이 풍전등화 같은 나의 인생을 딱 잡아준 이다. 사랑은 위대하다. 평소라면 쳐다도 안 볼 극강의 경쟁구도 속으로 나 스스로가 뚜벅뚜벅 들어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버텨야 했다. 정말 싫었지만 나는 버텨야 했다. 그러던 순간 25살 신입사원이었던 한국 친구가 잘렸다. 우리 팀이었던 오카모토 언니도 나갔다.. 나랑 친했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그만두고, 웃음이 끊기지 않았던 회사에, 이젠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매 순간이 전쟁이었고, 그 안의 모두가 치열했다.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많이 괴로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근처 바닷가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 것이었다. 바다가 자연스럽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싱가포르는 슬프게도 바다도 참으로 인공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싱가포르는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줄 것이 하나도  곳이었다.


깜깜한 밤에 바다고 있으면, 근처 3~4미터 간격으로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구나.. 참으로 얄궂은 인생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음을, 그리고 너와 나는 한 배를 타고 있음을 우리는 늘 힘든 순간에 깨닫는 것 같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그때의 시간들이 나를 많이 바꿨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2% 부족하다고 느끼던 내 나라가 알고 보니 가장 안전한 곳이었음을 알게 해 줬기 때문이다.


내 나라는 회사에서 잘려도 비빌 곳이 있고, 잘린다고 해서 비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힘들 때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으랴. 극한의 체험을 통해 내 나라의 존재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나는 버티고 또 버텨서 마지막 생존자 70인 안에 들 수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쨌든 사랑은 나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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