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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Kim Feb 21. 2022

방랑 벽의 끝, 결혼 (14)

'그가 나에게 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멈춤 없이 흘렀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입국일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오기 바로 전날까지 두근두근 괜찮을까 걱정이 많았던 나이지만 막상 공항에서 큰 짐을 가지고 온 그를 만나니 진심으로 반가웠다. 덧붙여서, 나를 보기 위해 싱가포르까지 와준 그에게, 나의 마음은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었더랬다.  


 위의 글만 읽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감사함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 사랑뿐 아니라 감사한 마음. 어찌 이보다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태솔로로 살아온 이에게는 이 오버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끝도 없는 감정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쌓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의미 없는 짓을 얼마나 많이 하게 되는지... ㅠ_ㅠ 이 글을 통해 사랑에 경험이 없는 남녀가 왜 쉽지 않은지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못되서가 아님을, 단지 경험이 없기에 그런 것임을 알아주면 좋겠다. -_-


...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은 나를 극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여 9시부터 현지인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하고 6시에 퇴근을 하면, 그는 회사 앞에서 반짝반짝한 골든 레트리버와 같은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며 '오늘 뭐 할까??' 라며 나를 맞이했다. 첫 2주는 괜찮았다. 어느 정도 체력도 있었고, 뭐 가자는 곳에 다 갈 수도 있었다. 고마웠으니까.. 여기까지 와줬는데.. 당연히 내가 해줘야지.. 그러나 3주 차에 들어서며... 나의 체력이 바닥을 치면서 아름다웠던 고마운 마음은 슬슬 멈출 수 없는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_¤


'저 자식은 눈치가 없는 거야? 내가 집에서 노는 것도 아니고, 이른 아침 일어나서 회사 갔다가 퇴근하자마자 지친 몸으로 니랑 놀아서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른 척하는 거야? 이기적인 쉐끼'


사실, 나는 오늘 쉬고 싶다고 강하게 이야기했으면 될 일이었을 것이다. -_- 근데 로버트도 예사로운 인간은 아니기에 열 번을 거절해도 열 번을 부탁하는 인간인지라. 경험이 없던 나에게는 사실 굉장히 벅찬 상대였..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가 Yes라고 할 때까지 집요하게, 그리고 느긋하게 1년이고 2년이고 끝까지 요청을 한다. 포기를 모르는 인간이랄까 ㅜㅜ



어느 날은 수영장에, 어느 날은 영화관에, 어느 날은 쇼핑센터에, 어느 날은 센토사에...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이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했고, 또 사랑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는 '사랑=희생'이라고 나만의 환상에 허우적거리며 있었던 것 같다. ㅠ_ㅠ 그래서인지 나는 미치도록 피곤하여 이가 흔들릴 때까지 그의 장단에 군말 없이 맞춰줬다.


결국 3주가 끝나기 전에 나는 터져버렸다.


"나 이제 못해. 너무 지쳤어. 우리 일주일 간 만나지 말자. 나한테 전화도 하지 마. 우리 회사 앞에 오지도 말고, 내 집에 오지도 말고. 그냥 일주일간 혼자만의 시간을 갖자. 너무 피곤하고, 너는 너무 이기적인 거 같고, 네가 배려를 1도 안 하고, 어쩌고 저쩌고..."


어제까지 세상 천사 같던 그녀가 갑자기 저리 돌변을 해서 일주일간 만나지 말자며 폭발을 하는 상황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엉엉 울었다. 하긴 내가 봐도 사이코지. 조금씩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니고,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폭발하니 옆에 있던 사람으로서는 이 무슨 일인가 싶을 거 같다. 내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겁에 질려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간 로버트는 정말 3일간 전화도, 회사 앞에도 절대 찾아오지 않았다.


3일간 뭔가 허전하긴 했지만 나름 혼자만의 사간으로 충분하게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혼자 퇴근해서 집에서 차분하게 노래도 듣고, 걷기도 하고.. 그래, 이게 바로 힐링이지.


그러다 퇴근 후 저녁거리를 사러 슈퍼에 갔는데, 웬일? 그곳에서 로버트를 만났다.


눈이 빨개진 채 나를 바라보며, 거리를 두며 '잘 지내?'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무슨 느낌인지 표현은 못하겠는데..  애처로움? 모성애? 사랑? 아무튼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감정이 나를 감쌌다.


"밥 먹었어? 우리 집에 가자. 저녁 해줄게~"


그렇게 3일 만에 나의 이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_-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란 모습에 익숙해져 가는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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