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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맛

feat. 열다섯 번의 낮, 신유진

by 해나책장


하루하루 닳는 마음으로 지하철과 기차를 타고 일을 다녔던 시간, 전철에 앉으면 눈을 감았다. 몇 년 전 여름의 일이다.
잠시 눈 뜨고 일어났을 때 내가 쉰다섯 살이길,
여기 이곳이 아닌 그리운 뉴욕이길 얼마나 바랬는지.

그때는 하루가 길었고 그 하루 동안 마주치는 말들과 눈빛들이 견뎌지지 않았고 겨우 하루를 견디고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다.
지나갈 괴로움인 줄 알았으나 정말 지나가긴 하는 걸까 진심으로 하루하루 궁금했었다.

여름이었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달의 미라클을 기도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읽었던 문장들,
그리고 일기들,
돌아보면 정겹다. 그 시절도 견뎌낸 나인걸 말할 수 있는 역사가 생겼다.

마음이 힘든 만큼 문장은 더 달았고
생각이 많아 글은 지금보다는 더 깊었었던 것 같다.
역경이 동력이 되어 생산해내는 문장은 언제나 얕지 않았다.

신유진 작가님의 '여름의 맛' 꼭지를 읽으며 그 여름밤의 온도를 떠올린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여름밤의 시원함과 차분함은 늘 좋았다.
그렇게 지나갈 줄 모르고 자주 초조하고 번뇌했었다.
그 시절에도 공평하게 낭만적이었던 여름밤의 기운을 누리지 못했다.

슬픈 날에 더 깊이 스며드는 문장들을 떠올리다 보면,
많은 책을 빨리 읽고 싶은 초조함이 가끔 경박하게 다가온다. 작가님 말처럼 동시에 여럿의 애인을 만나는 마음처럼 얕아진다.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듯 읽어온 책들은 지금도 자주 들춰본다.
그러고 보니 이 책도 무척 천천히 읽었구나. (난 읽는 속도가 남들보다 많이 느리다. 생각이 많은 탓이다.)

그 여름의 기도를 떠올려본다.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다.
그 시절의 내가 마음을 기대었던 것들과 문장은 여전히 아름답게 남아있다.

2020년 상반기가 쉽지 않았다.
6월이 끝나간다.
만만치 않은 위기의 나날들을 견뎌냈으니 다가오는 하반기엔 행운이 내 편이었으면 싶다.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괜찮다.
괴로워도 나아갈 거니까. 마음을 다지며.



정말 내 삶은 괜찮아질 것인가.
여름 내내, 해변의 도시에서 파스타를 씹고 또 씹으며 수십 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싱거운 그 요리는 참 다양한 맛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씹을수록 괜찮다고 생각했다.
꽤 괜찮은 맛이었다.
다만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맛인 줄 모르고
너무 빨리 삼켜 버린 것이 이제 와 조금 후회된다. p.218

그러고 보니 요즘 다독을 한다.
읽어야 할 책이 많기 때문이다.
허황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여럿의 애인을 만나는 바람둥이처럼 나는 얕은 마음을 주고받는다.
순간순간 '바로 그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생각보다 빨리 저물고 급하게 사라진다.
누군가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제 단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것이 숨겨 놓은 여러 개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여름의 맛) p.218

#열다섯번의낮 #신유진 #1984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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