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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을 덮으며

그녀가 내게 던진 질문들

by 해나책장





"소녀의 말을 빌리자면, 빅토르 위고도, 페기도, 이런 상황을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
정제된 문학은, 정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무력해진다." p.216


게으름 없이 성실하게 읽었는데도 2주 가까이 걸렸다.
정제된 문학은 정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무력해진다는 역자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내 마음이 딱 그랬다.
마음이 휘몰아치고 내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나는 한 마디도 그것을 정리해낼 수 없었다.

그것이 내가 만난 최초의 아니 에르노, 그리고 빈 옷장이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어느 나이 든 여자의 주방에서 벌어지는 불법 낙태 시술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수술을 받는 소녀의 가난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서사가 전개되다 다시 낙태 시술 장면으로 돌아오며 마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낡은 옷장의 문이 열리고, 소녀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동안 스스로 자신의 세상과 문화를 만들어가야 했던 한 소녀의 폭풍 같은 번뇌를 들어야 한다.
아름다운 문체, 슬퍼도 청초한 단어들이 주는 위안을 기대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지 말길.

아니 에르노가 보여주는 세계는 적나라하고 퇴폐적이고 칼처럼 내 묵은 상처들을 찌른다.

경중은 다르고 문화와 상황은 다르겠지만 '나' 중심적이었던 세계가 주체와 객체, 자라온 세계와 충돌하는 또 다른 세계로 분리될 때 느끼는 충돌과 고통의 기억들과 마주하게 한다.



"이 편과 저 편을 다 경험해보는 건 행운이야,
그 속에서 너의 문화, 너의 세계, 너의 해석을 다져가는 거란다."



그렇게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드니즈 르쉬르에겐 그 누군가가 없었고,
연륜과 성숙에 기댈 만한 교육을 잘 받은 부모가 없었고,
그들과는 달라도 '내 것'은 우월해 라고 자부할 만한 어떤 성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성전과 감옥을 지어간다. 배우지 못하고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 과정이 단단하고 단정했다면, 그걸 표현하는 아니 에르노의 문장이 단아하고 유려했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유형의 잘 쓴 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서, 문장과 문장 속의 그녀의 마음을 따라가기가 힘들 만큼 처절하고 날카로워서 이 책은 내게 너무 큰 흔적을 남겼다.

이 책의 말미에서 역자는 말한다.


"이 칼은 아픈 곳이 있었음을 혹은 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선명한 피가 흐르는 그곳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당신은 그 상처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p.221

나 역시 내게 묻고 싶다.
이 상처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느냐고....

나는 답을 할 수 없다.
그저 함부로 답을 할 수 없는 세상의 한 면을 더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내 앞에 드니즈 르쉬르가 앉아 있다면
혼자 수술을 마친 그녀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에 태어나면 그다음은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정제된 문학이 정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난 그 지점에서, 나는 당신의 힘든 이야기를 온전히 들었고, 조금도 게으름 부리지 않고 느리지만 성실하게 들었고,
당신의 빈 옷장을 천박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다.

내게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던 책.
그것이 나와 아니 에르노의 첫 만남이었다.

#빈옷장 #아니에르노 #신유진 #1984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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