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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의 계절감 속 등불 같은 이야기

줄리아나 도쿄를 덮으며

by 해나책장

오키나와에는 고무나무가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들은 뿌리가 얽혀 태풍으로부터 오키나와를 지켜준다.
이 끝에 있는 나무와 저 끝에 있는 나무는 서로를 보지 못해도 서로를 지켜주고 있는 거다.

한정현 작가의 줄리아나 도쿄는 오키나와의 고무나무 같은 책이다.
서로 보지 못해도 서로를 지키려는 등장인물들의 의지가 이 소설의 어두운 배경을 밝히는 등불 같은 역할을 한다.
차가운 겨울 공기와 하얀 눈, 그리고 마음의 언어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낭만이고 힘이다.

애인의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 속에 모국어를 잃은 한주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유키노가 만나 서로를 통해 사랑의 언어를 배워간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루에 하나씩 말하는 법을,
마음을 주고 서로를 신뢰하는 법을,
늦더라도 한 걸음씩 정확히 내딛고 온전하게 통과하는 마음으로 길을 건너는 법을,
식탁에서 행복한 한 끼를 넉넉하고 천천히 먹는 법을.

그렇다. 우리의 단단한 언어는 건강하고 온전한 사랑 속에서 배워진다.
그 사랑이 이 소설의 힘이다.

남성 중심의 폭력성 속에서 자신을 잃은 사람의 무력함, 미혼모와 그 자녀가 사회에서 받는 멸시, 성소수자의 고립감, 80년대 노동자들의 밟혀진 인권,
작가는 그 일들을 연필로 또박또박 눌러쓰듯 소설 속에 녹여내며 그들을 줄리아나 도쿄 단상에 세운다.
그 단상은 그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소설을 읽으며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왜 인물들은 어떤 폭력성 앞에 자신의 발로 등을 돌리고 걸어 나오지 못했을까?
이제 그만해. 난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야. 말하고 끊어내지 못했을까?

소설을 다시 읽으며 문득 알게 됐다.
그건 내가 가스라이팅을 글로 배웠기 때문이란 걸.
현실 속에 서서히 무력하게 짓밟히고 훼손되는 마음을 알지 못한 거란 걸.
그걸 이해한 순간 마음이 무너질 듯 어지러웠다.
소설 속 인물들의 연대는 서로에게 어떻게 스며들었을지 헤아릴수록 내내 먹먹했다.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받길 바라는 사랑이 지키기 위한 사랑으로 바뀔 때 서로 얽혀 섬 전체를 지킨 오키나와의 고무나무처럼 견고한 세상을 만든다.

이 소설을 정리하며 이승철의 아마추어를 계속 들었다.
소설 속 인물들을 줄리아나 도쿄의 단상 위에 세웠다.
그 순간 주인공이 되는 그들의 인생을 기뻐하며 환호했다.

하얀 눈의 계절감 속에서 마음을 붙들어주는 등불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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