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벤느망 후기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직을 맡았던 2021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 레벤느망. 아니 에르노의 글을 아끼는 독자로서 <레벤느망>을 보러 갔다.
1963년도 프랑스의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안. 단 하룻밤의 일로 임신을 하게 된다.
'언젠가 아이를 낳고 싶지만, 아직은 모든 생을 던져버리고 싶지 않다'는 그녀는 낙태를 결심하고 감행한다. 당시 프랑스 법률에서 낙태는 시술자와 피시술자가 함께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중범죄였고 임신은 여성이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영화는 20대 여성에게 일어났던 일회성 사건을 통해 여성이 겪는 사회 폭력의 단면을 섬세하게 폭로한다. 열여덟의 어린 소녀가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그 어린 소녀가 혼자서 낙태를 감행할 때, 불법 낙태 시술자의 도움을 받아 낙태를 할 때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심약한 탓에 덤덤하게 보기가 힘들었다. 그 장면들을 제외하고도 영화를 보는 내내 피로감이 굉장히 쌓였다.
아이를 낳으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둘이 만들었는데 상대 남자는 함께 이 일을 돌파하려 하지 않는다. 안이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다.
안의 옆모습과 목덜미 뒷모습을 계속 클로즈업하며 무심하고 섬세하게 안의 내면을 포착해내는 오드렌 디완 감독의 시선도, 바르톨로메이의 섬세한 연기도 압권이다. 관객이 안의 입장에서 낙태의 육체적 통증과 심리적 고통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다. 굉장히 잘 된 연출이라는 감탄과 함께 안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계속 몰입하게 되기에 영화 내내 피로감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압도한다.
레벤느망은 사건(event)이란 뜻의 프랑스어이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이 원작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실화이다. 그녀는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쓰지 않는 프랑스의 소설가이다.
안은 도망가지 않고 그 모든 압력을 돌파해내며 나아간다. 방법을 찾아내 아이를 지우고 자신이 속하고 싶은 세계로 돌아온다.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 돌아왔다고 말한다. 출산(재생산)을 위한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온 그녀의 온도는 다르게 흘러간다.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이고 그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한 사람의 독립적인 성인으로 단단히 서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말이다.
"이제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빈 옷장>을 통해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만났을 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없다. 철저하게 냉정하고 독백적이다. 영화 속의 안이 돌파해온 시간을 보면 왜 그녀의 글이 그렇게 단단하고 날카로운지 이해하게 된다. 그 시간을 어떤 절박함과 당돌함으로 통과해왔는지도.
사무치게 고독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혼자 통과해낸 사람의 옆모습을 나는 안다. 그런 시간을 다 지나간 후에 일상을 되찾은 마음도 안다. 알기에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아니 에르노가 그려낸 어린 소녀 드뉘즈 르쉬르, 그리고 안을.
아니 에르노의 책을 통해 드뉘즈 르쉬르(여기서는 안)을 만난 후 그 시절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했던 작은 소녀가 내 마음에 살고 있다. 내 아픈 손가락처럼 내 마음에 품은 작은 소녀. 그때 필요했을 그 누군가가 되고 싶어서 미래의 내가 말을 건넨다.
어제는 <스펜서>를, 오늘은 <레벤느망>을 보았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서사가 닮았다면 닮았다. 다이애나는 자유분방한 삶을, 안은 글을 쓰는 삶을 원했다. 가장 자기다워지는 길을 찾아간 여정일 거다.
https://brunch.co.kr/@hannahbookshelf/243
<레벤느망>은 여러 관점에서 굉장히 웰 메이드의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추천하긴 힘들다. 사실 아니 에르노의 책들도 내겐 그랬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좋았으나 각자가 가진 취향이 다를 것이고 이런 무거운 피로도를 감당해내고 싶을지에 대해서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매끄럽지도 유려하지도 찰랑거리지도 않는 그녀의 기억은 거칠게 튀어 올라와 때로는 흐름을 방해하고,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덜커덩거리는 지점을 두고 <그것은 허구 없는 나의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작가 앞에서, 우리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우리 역시 삶의 울퉁불퉁한 결을 지나왔고, 또 지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삶의 결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이 매끄럽고 찰랑거리기만 한 길을 지나왔다면 아니 에르노의 책을 펼쳤을 리 없지 않은가..."(신유진, <빈 옷장> 옮긴이의 말)
혹시 이 문장에 눈길이 머무는 분이 있다면, 아니 에르노의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faAtOv-sSOY
https://www.youtube.com/watch?v=2gIimuAtoV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