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숨>

읽어봐요 싸이파이 9

by Dolphin knows


창식이 아니라고! 봉남이라고

글은 못써도 말싸움이든 총싸움이든 엄청 잘하는 이창식, 아니 테드 창씨

영화 <극한직업>에서 내가 테드 창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냥 뿜어버렸다. 배우 분의 연기가 워낙 출중하기도 했지만. 하필 그 인물 이름이 테드 창인게 문제였다. 고개 푹 파묻고 싸이파이만 n년간 읽던 내게 '싸이파이계의 아이돌, 확신의 센터상 작가'로 존경해왔던 분의 이름이 영화에 나왔을 때 난 놀라 자빠졌다.


맞다. 테드 창. 그러나 이 분의 성은 강씨도 아니고 대만계 미국인도 아니었고 성이 정이나 장도 아니라

그냥 이창식이었다는 거. 그리고 키보드나 펜보단 칼이나 총 그리고 구강액션의 달인이었다는 게 새로웠다.

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분이 혹시 정말 내가 좋아하는 존잘님인 강봉남(姜峯楠, Ted Chiang)의 팬이어서 이렇게 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단다. 우연이었단다.


22세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으로 시작된 싹쓸이
휴고상 4번, 네뷸러상 4번, 로커스상 4번
드니 빌뵈브 감독이 영화화한 <Arrival>
즉,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원작자

테드 창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게 과연 우리가 아는 SF가 맞나 싶다. 우선 싸이 파이다 싶으면 미래나 근미래를 다루는 게 국룰처럼 여겨지지만 이분은 어떤 시대든 상관이 없다.

흔한 미래 대신 오히려 중세 이전의 고대, 유럽보다 한참 앞섰던 시절의 아라비아, 혹은 연금술의 시대를 오고 간다. 또한 현대의 이야기도 있다. 인간이 만든 메타버스 속에서 스스로 서식하는 AI동물들, 서로의 미와 추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칼리아그노시아를 의무 착용하는 아주 독특한 세계, 그리고 종교적인 체험까지 무척 방대한 시대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작가의 '인장'은 드러난다. 바로 과학적 논리다. 브라운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 세계적인 소프트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특히 '테크니컬 라이터'로 일했던 특징이 보인다.

어떤 시대든 어떤 등장인물이든 또 어떤 세계든 그 안에는 과학적 정합성이 매우 우아하고 깔끔한 스타일로 잘 정돈되어 있다. 테드 창이 그려내는 세계는 확실히 다르다. 그냥 배경만 대충 미래고 신기한 동물과 기기와 달이 뭐 두서너개 뜨게 만들고 정작 스토리는 왕조시대 혹은 서부개척시대 또는 그냥 현실을 풍자하듯이 반영하는 이야기들과 저 먼 대척점에 서있다. 과학을 데코레이션이나 도구로 사용하는 대신 과학 자체를 소설의 주인공이자 스토리의 핵심으로 박아두었다.



이 분의 최근작이며 단편집인 <숨>. 이 책의 표제작인 <숨>은 스팀펑크 느낌이 물씬 나는 기기 인간들의 세계다. 허파는 알루미늄으로 뇌는 금박으로, 팔다리는 촘촘한 톱니바퀴와 기기장치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산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계는 거대한 크롬 돔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다름 아닌 팀 버튼의 애니메이션 <나인> 말이다.

<나인> 다들 망했다고 하지만, 내게는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다름 아닌 공기다. 공기를 호흡하고 관장하는 기관인 폐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기관은 없고, 그들은 공기를 충전하는 공간에서 소통을 한다.

또한 이 세계는 꼭 복잡한 시계 속에서 모든 톱니바퀴들이 착착 돌아가듯. 정말로 정밀하고 계획적인 세계다.

매년 새해 첫날 정오에는 각 구역별로 포고꾼이 시 한 구절을 낭독한다.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낭독 전에 탑시계가 울렸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 기기 세계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식이다. 항상 테드 창은. 처음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이야기하니 아 우리와 같은 세계인가 싶다가 전혀 우리가 사는 메커니즘과 다른 세계 심지어 존재방식도 다른 화자들을 등장시킨다. 이렇게 심드렁한 이유는 이미 작가가 그 세계를 아주 치밀하게 설계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나의 또 다른 최애 작가 H.P. 러브크래프트와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일단 인간의 눈으로 아주 이상한 존재를 감지하거나 보거나 하면서 미치고 놀라고 공포스러워하는 게 러브크래프트라면, 테드 창의 주인공들은 이미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시대에서 하나같이 잘 적응하고 있어서 놀라거나 울면서 편지 쓰거나 도무지 미치질 않는다. 혼자서 이걸 비교하며 낄낄거리고 웃은 적도 있다.


여하튼, 저 <숨>의 세계의 주민들은 우리처럼 생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폐가 폭발해서 죽더라도 팔다리는 재생해서 다시 되살릴 순 있지만 이상하게도 기억만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 기억은 어디에서 올까라고 고민했던 주인공, 즉 해부학자는 특수한 장치를 고안해 자기의 뇌를 해부하기에 이른다. 중간에 묘사가 보이는 데 정말 스팀펑크스러워서 재미있었다. 결국 얻은 결론은 이거다. 기억은 뇌에 새겨지는 게 아니고,


공기는 단순히 우리의 사고를 발생시키는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흐름의 패턴이었다.


그리고 이 발견이 디벨롭 되자. 매우 절망적인 전망이 나온다. 바로 이 세계를 주도하는 흐름 자체가 이제 '평형상태'로 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시계가 빨라진 거다. 시계는 정확했는데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공기의 흐름이 점점 잦아들면서 공기를 통해 살고 사고하던 주민들의 지각이 점점 느려지고 굼떠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크롬으로 된 거대한 돔이며 닫힌 세계다. 나 같은 지구인이 사는 무한히 열린 세계가 아니라는 게 결정적 차이다. 지구는 일단 자전과 공전을 멈추지 않으며 또 지구의 대기권은 우주로 열려였다. 그래서 때로 태양계에나 조금 뒤쪽에서 날아오는 크고 작은 운석들을 맞기도 하고 뭐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다.

그러나 내 머릿속으로 그려 봤을 때 이 <숨> 세계의 주민들은 육면이 꽉 막힌 수조 속의 물고기 같았다. 한번 누가 크게 쥐고 흔드니까 물은 그 운동에너지를 받아 여기저기 튕기고 물이 섞이고 하지만 결국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물이 잔잔해진다. 물고기야 물이 잔잔하든 하지 않든 물속에서 헤엄을 치며 살긴 살지만 이들은 다르다.

존재 방식 자체가 기체의 흐름으로 되어있는데 그 흐름이 점점 잦아들고 평형상태로 간다. 한마디로 종말인 것이다. 기억이든 생각이든 움직임이든 말이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지만 딱히 답은 없고, 주인공은 혹시라도 이 닫힌 세계가 누구에게라도 발견되고 이 세계가 뚫려 혹시라도 흐름이 생기면 자기는 그 흐름을 타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거라는 쓸쓸한 기대로 이야기를 접는다.



2009년 테드 창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어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게 익숙한 신화는 그리스 신화인데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세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이야기하는 과정에 현재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않다. 대신 과거가 더 나았다는 것, 그리고 과거에는
이렇게 대단한 영웅들이 살았기에 더 대단했고 어떻게 보면 과거를 미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SF와는 많은 지점에서 반대된다.
SF는 현재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라는 가능성과 그것의 미래에 대해 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미화와는 굉장히 동떨어진 장르다.
하나 덧붙이자면, <바빌론의 탑>은 배경이 고전 신화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변화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으며 주인공이 고전 신화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이해의 관점을 얻고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야말로 SF와 신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테드 창, "SF는 변화하는 세계를 담는 그릇이다", <프레시안> 2009. 7. 24


익숙한 것보다는 낯선 것을 잘 그려내는 작가. 테드 창은 이전엔 상상도 못 했던 세계를 구성하고 그 세계가 굴러가는 모습과 다양한 가능성을 과학과 논리의 바탕 위에 심드렁하고 견고하게 쌓아간다. 인간과 인간의 감정의 부딪침보단 어떤 상황이나 세계가 스토리의 중심이 되어 납득할만한 흐름으로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 아마도 이 점이 나를 비롯해 많은 작가와 독자 평론가들이 테드 창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일 거라 생각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그 호기심이야 말로 다른 어떤 욕구보다 강렬한 동인이다. 낯선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기에 나는 테드 창의 세계에 맘껏 뛰어들어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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