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소망없는 불행>

어떤 독서의 기록 10

by Dolphin kn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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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고통받는 추모


페터 한트케는 내가 중학생 때 알게 되었다. 이 작가의 단편들을 읽기 전 그가 대본을 작업했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봤고 거기서 영겁의 시간 동안 인간들의 삶을 살펴보고 아주 단정하고 묵묵하게 일을 수행하던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을 주목한 기억이 있다. 결국 인간세계에 뛰어든 다미엘에게 서사가 많이 할당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시인의 깊은 내면과 통하고 그의 내면을 묵묵히 들어주며 흑백 그러니까 영원의 세계를 지켰던 카시엘이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세계의 다른 차원 혹은 영원을 상징했던 그 흑백 지대가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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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만난 단편이 '왼손잡이 여인'. 이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는 꼭 C-SPAN 같았다. 어떤 극적인 필터라든지 연출의 손길을 뒤에 감추고 상황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그저 상황만을 묵묵하게 중계하는 게 아니다. 관찰과 거리 두기에 특화된 작가. 그러나 그 안에서 분명히 흐르는 고통과 눈물 환희의 순간이 매우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페터 한트케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망 없는 불행'은 한트케 특유의 절제되고 관찰을 위주로 한 서사 속에 뜨거운 슬픔과 한 인간의 고통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고통은 그의 아들로 온전하게 전이된다.


나는 이 소설이야말로 '온전한 추모'의 전범을 보이는 작품이라고 본다.


보통 장례식에서는 사람들이 고인의 단편들을 이야기한다. 혈육이면 자기에게 모친이나 형제자매의 역할을 했던 부분을 이야기하고 그 부분이 자기에게 미친 영향과 기억. 고맙거나 아쉬웠던 것.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의례적으로야 짧게 아쉬움과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고인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으므로 장례식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실 장례를 치르는 가족들과 조문객들일 수밖에 없다. 절절한 사모곡을 부르는 것도 전부 자녀들의 몫이고 배우자를 잃은 누군가의 몫이다. 자신들의 슬픔에 주목할 뿐 누구도 망자의 삶과 슬픔에 그대로 뛰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에서 주인공은 자기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전 생을 고통받았던 한 사람의 삶을 아주 세심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어머니의 자살소식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자살한 여자의 삶을 되감기 하듯 찬찬히 보여준다.

그 유럽의 작은 나라 출신, 그것도 형제가 많은 집의 여자아이는 참 많은 것을 박탈 당할 수밖에 없다.


난 항상 강해지지 않으면안 되었으면서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좀 약해지고 싶었단다.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중



명석하고 특유의 친화력과 문학적 감수성을 지녔던 한 아이는 하필 그 시절에 여자아이로 태어난다.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여자애는 절대 학교에 보내지 않는 시절에 말이다.

지혜와 꿈, 추진력이 있어 다른 도시에 가서 요리사를 하고 부기도 배우는 등 애를 썼으나 환경은 항상 이 사람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면 꼭 뒤로 잡아끌거나 넘어뜨렸다.

큰 전쟁을 겪는 동안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가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낸다. 때로는 유부남 군인과 연애를 해서 아이를 가진 채로 다른 군인과 결혼하고, 남편의 술 주정과 학대를 겪으며 몰래 아이를 지워야 했던 과정들이 가감 없이 그려진다.


무엇보다 결코 낭만이 될 수 없는 가난. 그 가난을 받아들어야 하는 과정이 아프게 그려진다. 이 소설의 미덕은 바로 여기서 나타나는데 그 슬픔을 아주 온갖 형용사를 써서 절절하게 드러내는 대신 상황을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아이를 향한 무조건 적인 사랑과 헌신으로 가난과 남편의 폭력 전쟁을 이겨낸 신화적이며 낭만적인 모성 서사는 거둬내고. 그저 살기 위해서 아이를 줄줄이 낳고 꿈을 포기하고 사람들의 비웃음과 온갖 생활의 불편을 참아내야 하는 생활인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점이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자살 후 아들은 이런 삶을 반추하며 장례식 때는 덤덤했다가 이후에 점점 그 고통에 자기 자신을 던져 함께 아파한다.


나를 돌봐줄 엄마가 떠났다. 나에게 따뜻한 밥을 해준 엄마, 온갖 고난에도 나만 바라보고 희생한 우리 어머니의 부재에 슬퍼하는 '아들'의 슬픔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부모이기 이전에 오롯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절망과 불행을 그대로 공감한다.


이 짧은 소설은 무심하고도 노골적이다. 절절한 단어 없이 한 사람의 생을 대한 묘사한 이 짧은 소설. 비록 분량은 길지 않아도 속에 매우 방대한 의미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아들은 평생을 '생존을 위해 원하는 것을 희생하며 살았던 엄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했다고. 자기 연민과 환상적인 추억을 걷어낸 추모로 '고인의 존엄'을 지켜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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