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뒤늦게 찾아온 황금 같은 시간 활용하기
**이 브런치는 홍보를 위한 목적보다, 경력단절을 겪은 아이엄마가 사회생활 복귀에 성공하기 위한 여정을 기록하는 곳입니다.
한국에 2025년 2월에 입국했다. 사실 호주라는 나라가 지상에 남은 마지막 낙원이라는 닉네임이 부끄럽지 않게 너무나 평온했고 아름다웠기에 떠나기 싫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에겐 자녀들이 있지 않던가? 아직 어린 4세 둥이들이 눈에 계속 밟혔다. 괜찮다고 공부나 잘 마치고 오라며 벌이와 양육 병행을 자처한 애들 아빠가 안심을 시켰지만 첫째 아이가 엄마의 빈자리가 컸는지, 틱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녀 출산과 함께 오은영의 금쪽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시청자였던 열성엄마였던지라 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틱은 운동틱과 음성틱이 있는데 대부분은 사춘기 전에 사라진다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없어지지 않으면 사회생활에 많은 지장을 준다고 알고 있기에 많이 걱정이 되었다. 엄마를 유독 따랐던 첫째였기에 불안감이 증폭되었던 것 같다.
사실, 아이의 틱을 늦게 알게 되었다는 자책감에 많이 힘들었다. 이 나이에, 엄마라는 사람이 자녀들을 제쳐두고 먼 타지로 나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은 후회와 자책으로 바뀌고 말았다. 엄마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이 양육보다 자신의 꿈을 향해 나가는 일은 쉬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이 브런치 글을 처음 시작했을 때, 자녀가 있고, 결혼한 여성이 경력단절을 이겨내고 사회로 돌아오는 여정을 솔직하게 그려보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 그만큼 어린 자녀가 둘이나 있는 아이엄마가 아이보다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이란 엄청난 각오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시작한 호주 유학행은 그래서 더욱 잘 해내고 싶었던 과정이 되었다.
다행히 호주에서 여러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고, (그렇게 받기 힘들다는 Distinction을 연거푸 받았으니) 호주 번역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역임하는 좋은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승낙 회신을 보냈고, 한 달 가량에 걸쳐 심사가 진행되었고 위너부터 차례로 3등까지 순서를 정했으며, 시상식은 멜버른에서 있었기에 참석은 할 수 없었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 되었다. 게다가 국제 학생회에서 학생회 임원으로 선거에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학생 회장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2025년 임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한국 학생은 한 명도 없고 선거 활동도 하는 것이 아닌 데다 인도 학생들이 주를 이루는 학교여서, 인도 친구들이 선출되었지만 한국인으로서 임원 선거에 도전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뿐 아니라, 학교에서 하는 연례행사인 장기자랑에서 노래도 불렀다. 동기들에겐 비밀로 하고 몇몇 나랑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신청하고 각자 무대에 섰는데, 마지막엔 다 같이 무대에서 떼 춤을 추었다. 이것도 호주가 가진 다양한 문화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경험이었다.
한국에선 나이와 지위, 자녀가 있는 기혼녀라는 사회적 역할 등으로 이런 행사에도 마음껏 참여하기 망설여지지만 편견 없는 호주니까 주저 없이 지원했다. 예전에 필리핀에서 유학할 때도 학교 행사는 패션쇼, 연극 등 다양하게 참여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성격 상 가만히 객석에 앉아서 구경만 하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이외에도 수출 무역 전시회 통역이나 호주 공공기관 통역, 그리고 학교의 과정 중 하나인 다수의 법원 참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영어를 잘하면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기회를 만날 수 있다.
동기가 소개해준 통역 자리였다. 한국에 먼저 간 통대 동기가 연락이 와서 호주에 언니 있는거 생각나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일을 소개해줬다. 나도 나중에 일이 생기면 소개를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주 공공기관애서 만난 한국에서 날아오신 고향사람들을 만나니 반가워, 사진도 함께 찍었다. 이 통역은 캔버라 까지 새벽 기차 타고 가서 오후까지 통역을 했다. 캔버라에서 오후 6시 이후에 버스, 기차, 비행기 어떤 것도 시드니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결국 1박을 하고 말았지만 너무나 즐거운 통역 경험이었다. 수백 장 되는 자료를 미리 공부하는 일도 오래간만에 하는 통역이다 보니 신나서 몰입이 더 잘되었다.
다른 전문직군과 통역 직군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통역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업무에 보람을 느끼는 점은 모든 직군이 동일하지만, 통역은 좋아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사회에 내가 쓰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양한 행사와 상황에 참여하게 되면 다이내믹한 경험이 끊임없으니 즐거움의 연속이 된다.
이 밖에도 번역 매거진에 글을 기고했고, 또 다른 여성 노동 인권 단체에서 프로젝트 출간에 참여하는 등 여러 경험들을 쌓아 올리는 1년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귀국한 것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자!라는 마인드로 4일을 일하며 3일은 학교에서 수강하고 일주일이 모자란 날들이었지만 또 언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을까 싶어 열심히 정진했다.
아이들을 한국에 떼놓고 유학이 왠말인가 싶었던 초반과 달리 너무 잘 지낸 모습에 놀라시지 마시라. 젊은 날 결혼하고 자녀 출산 양육만 하다 바깥 공기를 마시면 갓생사는 기분이 들고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나가보니 너무나 좋았던 유학생활. 이제는 여자들도 집에서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목표와 꿈을 향해서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라고 말 하고 싶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드리고 싶고, 나라는 사람도 해냈기에 모든 기혼 여성들이 서랍속에 감춰두었던 꿈을 꺼내서 비춰 보기를 바란다.
한국에 와서 다음단계는 자연스레 취업준비를 하는 상황이니 다음 편엔 그 부분을 올려볼까 한다.
고령자의 통대 졸업 후 취업 준비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