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와 함께 있는 게 불편하고 불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완벽한 부모의 통제 아래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 자란 제게, 아이란 존재는, 너무나 모호하고 통제 불가능하며 그저 실수 투성이인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가 실수하고 배워나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 아이를 기다려주고 가이드해 줄 '어른'이 제 안에 전혀 없었던 거죠. 그렇게 준비가 안 된 채로 아이를 낳았고 지금까지도 실수를 거듭하며 아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아니, 같이 커가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예전엔 이런 미완성의 제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실수하면 세상이 끝난 듯 울고 불고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며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제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또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상황을 회피하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저에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이가 저의 감정 분출 방식(분노폭발 혹은 회피)을 모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아이를 옳은 방향으로 가이드할 수 있다', 라고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책, 김소영 선생님의 '어린이라는 세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들이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정서적 자원이 많지 않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해 주어야 할 것들이 꽤 분명합니다. 화내지 않고 기다려주기, 몇 번이고 설명해 주기, 용서해 주기, 안아주기, 그리고 넘치도록 사랑을 표현해 주기. 분명히 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힘들어요.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면 더욱 힘듭니다. 그래도 이 일을 해 내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김소영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이를 기다려주는 순간 혹은 화를 잘 참아내는 순간에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거나 안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쁘고요. '나도 잘 기다려 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어'란 자신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좋아지는 순간들이 점점 쌓이고 내가 좋은 부모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뿌듯함과 기쁨이 몰려옵니다. 귀한 경험입니다.
등교 준비를 해야 하는데 꾸물대고 있는 아이에게, 시간 맞춰 나가려면 알렉사(아마존 AI)와 그만 놀고 아침밥을 먹으라고 얘기합니다. 다섯 번 정도 얘기를 했는데 늑장을 부리다 학교에 지각하게 생겼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몇 분을 더 지체하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며 얼굴이 붉어집니다. '거봐, 엄마가 도대체 몇 번 말했어, 꾸물대지 말고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랬지. 오늘 학교 지각이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습니다. 제가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면 아이는 기분이 일단 상하기 때문에 그 감정을 다루느라 '생산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피드백은 화를 내며 전달하면 안 됩니다. 그건 피드백이 아닌 분노 투척입니다. 심호흡을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 학교에 늦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은 지금 바꿀 수 없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아이에게 소리 지르거나 다그치면 아이는 여기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내 기분도 괜찮을 리 없다'. 그리고 최대한 단호하게, 하지만 따뜻함을 담아 이야기합니다.
"학교에 늦지 않도록 내일은 더 일찍 준비하자. 내일은 오늘보다 잘할 수 있어. (도로 상황에 따라 늦을 수도 혹은 정각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혹시 1분이라도 늦게 교실로 들어간다면 선생님께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그렇게 몇 날을 거듭한 후에야, 드디어 아이는 스스로 늦지 않게 등교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울컥하는 마음을 꿀꺽하며, 제가 바라던 것은 한 가지입니다. 아이가 빨리빨리에 대한 압박 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기를. 그래서 이 아이가 나중에 자기의 아이를 기다려줄 때 힘들지 않기를.
비관적이고 극단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비관과 극단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인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짜 경험'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아이들의 사고 틀이 비관적이고 극단적이 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맨날 나한테만 뭐 라그래, 나만 운이 나빠, 나한테는 항상 안 좋은 일만 생겨'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왜 그럴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비관적인 사고방식은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에게 우울감을 유발하는 큰 요인이기 때문에 이 사고의 틀을 낙관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이분법적 틀(나만, 항상, 전부 다)은 아이들이 성장형 사고방식 Growth mindset을 갖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며 따라서 이 틀로 세상을 보는 아이들은 배움에 회의적이고 실패에 쉽게 좌절합니다. 다행인 건 우리가 연습을 통해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쉽게 배울 수 있고요. 유명한 미국의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8세에서 12세까지의 아동을 연구한 프로젝트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낙관주의(skill이라고 표현)를 배우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우울증의 위험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고 육체적 건강을 향상하며, 아이들에게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회복 탄력성을 제공한다. 낙관주의자들의 세상은 더 크고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The Optimistic Child by Martin Seligman)
낙관주의를 배우는 데 유용한 도구가 있습니다. Martin Seligman이 그의 책 'Learned Optimism'에서 제안한 ABCDE 모델이 그것인데요,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A(Adversity, 불운한 사건 혹은 불쾌한 경험): 친구가 내 문자에 이틀 째 답하지 않고 있다
B(Belief, 믿기): 그 애가 나를 무시한다
C(Consequences, 결과적으로 나의 감정): 점점 화가 나고 그 친구와 절교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D(Disputation, 자신과 논쟁하기): 한 번 답을 안 한다고 해서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나?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믿어버리고 화를 내는 것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E(Energise, 기운 차리기 또는 격려하기):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할 것이고, 내 기분이 상황에 휘둘리도록 두지 않겠다.
*이 모형의 D는 원래 3Ds입니다. Disputation논쟁, Distraction주의 분산, Distancing거리두기 이렇게 세 가지 중 가장 중요한 Disputation을 예로 들었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앞서 감정이 올라와 있다면, 주의 분산이나 거리를 두어 사건을 관찰함으로써 불안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이 모형을 자주 연습해서 자동적인 반응이 일어나도록 내재화할 수 있다면, 처음 비관적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점점 짧아질 수 있고요. 아이들과 함께 해 본다면 큰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 활동을 함께 하면서 오고 가는 대화를 통해 아이를 더 잘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즐거움도 큽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합니다. 물론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행복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이므로 어느 누군가로부터 얻거나 그들이 대신 찾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 스스로 행복해지도록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도와주어야 할 상대가 우리의 아이들이라면 그 나눔의 과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될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실 테죠. 우린 장점이 많긴 해도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주 실수하고 계속 배워나가요. 하지만 마음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합니다. 아이들 앞에서만 그런 척하는 가짜 말고 진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라고요. 실수하는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사회의 규범을 잘 지키고, 타인을 무시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한 마음을 갖는, 그런 좋은 어른이요. 제가 스스로 좋은 어른이 되어간다고 믿고 노력하며 살아가니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진심으로 즐겁습니다. 아직 이 중요한 과업의 한가운데 있지만,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으리란 기대와 자신으로 마음이 벅찹니다. 부모의 통제 아래 학습된 무기력만으로 꽉 차 시들했던 제 모습이 아직도 깊은 흉터처럼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일어난 일을 부정하거나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을 바꿀 순 없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제 시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잘 살아가기 위해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시도해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더 나은 방법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도 제가 속한 로컬 페이스북 그룹에는 잃어버린 물건의 주인을 찾아주려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의 물건이고 수소문 끝에 십중팔구 주인에게 돌아갑니다(작은 커뮤니티에서 이웃 간 소통이 잘 되다 보니 가능한 일이지만요). 아이의 물건을 소중히 다뤄줌으로써(젖은 인형을 실내에서 말려 다시 밖에 내다 놓았어요) 인형을 잃어버리고 상심했을 아이를 걱정하는 좋은 어른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어른이 많은 세상, 공감해 주고 기다려주는 어른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자라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그 세상, 우리 같이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