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Jun 30. 2023

예민함 파헤치기 1

위니 던의 감각 프로파일(Sensory Profile)

예민하다는 건 뭘까? 우리가 보통 '저 사람 엄청 예민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감각적으로 예민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심리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고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말일까. 나의 경우에는 타고난 예민함이 있는 상태에서 불안정 애착을 갖고 정서적 학대의 환경에서 크며 심리사회적 예민함이 더해져, 20대 중반이 되자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예민함을 갖게 되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도 온 신경이 곤두서고 가족들이 쾅 닫는 문소리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예상하지 못한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기 일쑤였다. 도서관이나 슈퍼에서 마주치는 타인의 눈빛에 괴로워했고 누군가의 무심한 말투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였으며 가까운 이들의 의미 없는 농담에도 화가 나 며칠씩 속앓이를 했다. 이렇게 예민했던 나는, 정말이지 불행했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람들이 예민함을 이야기할 때 꼭 언급하는 인물이다. 소리에 너무 예민해 평생 코르크로 된 방에 틀어박혀 집필에만 전념한 사람인데, 사실 그는 천식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그래서 외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식의 한 요인이 스트레스라는 걸 감안할 때 그가 예민해서 천식에 걸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천식 때문에 더욱더 세상과 단절된 채 외부 자극을 통제하며 살아간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칩거를 통해 세상에 내놓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대하소설인데, 그의 예민함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당사자에게는 시련이었던 특성이었지만 그의 예민함에는 장점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사고가 깊고, 같은 체험이라 할지라도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예술적, 문학적인 재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지인 중에 미술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면 모든 감각 기관을 동원하는 듯 자세하고 섬세하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도 그녀의 시각과 후각을 빌린 듯 세상이 민감하게 읽힌다. 글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글에 묘사되어 있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예민한 사람이 써 내려간 글은 그런 힘이 있다. 창의적이고 표현적이고 감각적이다.


나는, 얼마나 예민한 사람일까?


1997년 직업치료 전문가인 위니 던이 발명한 Sensory profile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어느 정도 예민한 사람인지 파악해 볼 수 있는 좋은 모델이다. 가로축은 행동반응과 자기 조절, 세로축은 신경학적 역치(반응이 일어나는 최소한의 자극량: 역치가 낮으면 자극에 쉽게 반응하거나 흥분한다는 뜻)를 나타내며 다음의 표에서와 같이 4개의 영역으로 분류된다.

Winnie Dunn(1997), 오카타 다카시((2018, 어크로스) 참고


이 감각프로파일은 나의 감각적인 성향을 알아보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얻겠지만, 우리가 흔히 예민하다고 이야기하는 역치가 낮은 그룹뿐만 아니라 둔감한 그룹(저등록과 감각추구)에 대한 분류도 가능하다. 이 프로파일은 감각적인 부분만을 고려한 것으로 인간의 예민함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심리사회적 요인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모델이라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시작으로는  유용하다.


나에게 자율성이 없다고 느꼈던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감각 과민인 상태로 지냈다. 그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로만 살았던 것 같다. 늘 피곤했고 긴장했고 불안했다. 지금 내 감각에 대한 예민도가 딱히 낮아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리사회적 예민도가 떨어지자 자극에 반응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엄청난 생활소음을 생산하며 집안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시시각각 생중계하듯 살아가는 남편과 아들 덕분에(?) 내 예민함에 연결된 짜증의 정도는 살길을 찾아 스스로 낮아져 갔다(체계적 둔감화...라고 거창하게 볼프의 행동 요법 이름을 따와 본다). 소리에 놀라는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 반응 후 일어나는 감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자 소음으로 인한 나의 스트레스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일본의 정신과의사 오카타 다카시의 연구에 따르면 감각적예민함보다 심리사회적 예민함이 개인의 행복도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일까, 신경학적인 예민함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심리적인 예민함이 둔해지자 갑자기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껴지는 건.


예민하다는 비난을 받고 자라며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을 키워오던 내가, 예민해서 잠도 잘 못 자고 두통약을 달고 살며 사람들 만나기도 꺼렸던 내가, '불쾌하다'즉각적으로 올라오는 기분(그 기분 자체가 안 드는 것은 아님)이 오래가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게 되고 나의 예민함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비합리적으로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럼 나는, 과연, 예민함을 모두 내려놓은 것일까?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