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D+1
혼자 사는 집에서 맞이한 이혼 첫날.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느낌이 왔다.
나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나 혼자뿐인 집에서 눈을 뜨니 평화와 고독이 동시에 몰려왔다. 마냥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감정이 오락가락하고 속 끓일 일은 없을 거다.
동시에 외로울 때도 많겠지. 하지만 괜찮다. 평화로운 고독이 전쟁 같은 행복보다 나으니까.
이혼 전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혼자 살이는 너무나 자유롭고 소중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내가 아파트로 이사 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살 집으로 처음에는 빌라 월세를 고려했다. 아무리 꾸준히 돈을 벌고 있다고 해도 이혼 후 이것저것 정리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게다가 결혼 후 모아둔 돈도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돈은 아끼면 아낄수록 좋았다.
하지만 결혼 후 신축 아파트에서 살던 내가 갑자기 좁은 빌라로 이사 가면 너무나 달라진 처지에 괜한 우울함이 몰려올 것 같았다. 그렇다보면 결혼해서 누릴 수 있던 것들이 그리워져서 힘들게 내린 이혼이라는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이지 못하더라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돈을 아끼는 것보다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작은 아파트 월세를 계약했다. 비록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단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교통이 편하고 집 앞에 공원과 도서관이 있는 것도 좋았다.
대학 시절 원룸에서 자취할 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외로움이 있었다. 그게 충분한 공간이 없어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17평 소형 아파트. 거실과 방이 분리되어 있어서 침실과 서재를 따로 둘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로망이었던 서재를 만들기 위해 마음에 드는 책들로만 책장을 가득 채우고, 글쓰기 편한 책상과 의자도 들여놨다.
신혼집을 꾸밀 때는 X와 상의해야 했는데, 이제는 내 취향만 100% 반영해서 집을 꾸밀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 덕분에 이혼의 우울함보다 혼자 사는 해방감이 더 컸다.
종종 일이 있어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도 아파트로 이사 오길 잘했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빌라촌의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면 분명 불안하고 무서웠을 거다.
안전하고 쾌적한 아파트로 이사 온 덕분에 나는 이혼 후 혼자 사는 생활이 제법 마음에 든다. 밤늦게 들어와도 무섭지 않고 혼자 살아도 불안하지 않다.
혼자 사는 여자에게 주거 비용은 곧 안전 비용이다. 조금 더 비싸더라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 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특히 나처럼 이혼 후 홀로서야 하는 사람이라면 꼭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최대한 여건이 좋은 곳,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을 권하고 싶다. 주거 환경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마음에 쏙 드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면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마음 추스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여자들이 진짜 원하는 건 결혼이 아니라 내 집이라고. 혼자서도 벌이가 충분해서 안전하고 쾌적한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도피성 결혼을 선택하는 여자들이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도 남편이 아니라 내 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