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나 Feb 15. 2023

오류가 난 돈

그 돈은 정말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민주가 기름값 하라고 준 그 돈. 영주는 그 돈을 받을까도 생각했었다. 매일 왔다 갔다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그리고 특별하게 크게 하는 일이 없이 옆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체력적인 면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돈이 노력에 대한 위로 겸 보상이 되었으면 싶었다.

"영주야. 네가 맏이니까 옆에서 아버지 잘 챙겨드려라."

영주 작은 아버지들과 고모들이 한 말들. 맏이니까, 일을 안 하니까 영주가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영주는 부담이 컸다. 

'아빠 병간호를 혼자서 하는 게 외롭고 힘들다고 하는 게 뻔뻔한 걸까?'

영주는 주변 도움 없이 홀로 육아와 집안일을 하며 자신의 시간을 갖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던 터라 아이들이 잠든 새벽이나 유치원에 가 있는 시간 중 일부를 자신만을 위한 일들을 조금이라도 하며 무너진 자존감을 채우려고 노력했다. 경단녀, 육아맘, 외벌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안타까운 시선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러지시면서 한 달간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진주가 "영주 언니. 그냥 부담 갖지 말고 가져. 기름값 하는데 보태."라며 준 돈은

"우리가 돈도 줬잖아. 그러니 힘들다는 말 그만하고 그냥 해."라는 뜻으로 1년 넘게 연락을 끊게 한 원인이 되었다. 영주는 1년이 지난 지금도 미주가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주와 진주는 시부모님께서 아이들을 봐주시고 집안일을 따로 하지 않으니 영주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게다가 회사도 안 다니니까 시간이 많을 거라 생각했나. 아니면 돈을 벌지 못하니 만만해 보였나.

당연하다고 하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었으면 미주와 진주가 이랬을까.'

영주는 직장이 없고 육아만 한다고 본인의 생활을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한 거 같아 속상했다. 다정이가 돌이 지날 무렵 일을 하고 싶어서 알아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부모님은 멀리 지방에 계시고 아이를 꾸준히 봐줄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 동안만 할 수 있는 일자리는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에 의미를 두자고 생각해 일 찾기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엄마로서, 아내로서 역할을 당당하게 해 나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늘 영주가 자랑스러운 아내이자 엄마였다.

'영주야. 아이들 잘 자라는 데에는 네 노력이 커. 고맙고 대단해. 덕분에 나도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 우리 영주 잘하고 있어!"

"우리 엄마 최고!. 엄마 음식이 제일 맛있어. 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남편과 늘 세상 최고 좋다고 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내 소신껏 당당하게 해 나갈 수 있었다.


'쳇. 직장 다니는 워킹맘이면 육아만 하는 사람 무시해도 되는 거야?'

'돈 있으면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영주는 순간 힘들어서 그 돈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너무 끔찍했다. 돈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와 다르게 상황이 안 좋아지면 나쁘게 작용한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돈이든 뭐든 주면 받는 걸 기대하는 게 당연한 이치였던가. 특히 돈은 더 그런 것 같았다. 50만 원에 대한 후폭풍이 대단했다. 그 돈은 영주가 당당하게 화내야 할 상황들을 한 순간에 무마시킬 수 있는 족쇄였던 것이다. 아이들처럼 겉과 속이 같아서 진실되고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이 될수록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행동과 말들로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갈등이 깊어지고 관계가 틀어지는 것 같았다.


영주는 어릴 적 할아버지 제사에 고모와 작은 아버지가 오셨던 때가 생각났다. 늘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하루 전날 영주 어머니께 제사 음식 비용으로 10만 원씩 보내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해라 몇 년 간 제사에 오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영주 어머니는 혼자서 그 많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셨다. 친척들은 느지막이 도착해서는 음식을 먹고도 설거지 한번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영주는 부엌에서 음식 준비에 설거지까지 하시느라 제사가 끝날 때까지 거실로 나오지 못하고 홀로 부엌일만 하시던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웠다. 큰며느리면 당연히 이래야 하나. 영주는 얌체처럼 앉아있던 고모들을 속으로 수도 없이 미워했다.

'돈 냈으니 난 당당해' 이런 건가 싶었다.

돈이면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는 것일까?

부자들은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한다. 가사도우미, 요리사, 개인 비서에게 돈을 주고 집안일, 요리, 생활하는데 필요한 잡다한 일을 하는 그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청소부, 요리사, 개인 비서의 삶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면 되는 것일까. 그 시간에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을 주니 존중하고 고마움을 표현해야 맞는 게 아닐까.


"영주 넌 어쩜 그렇게 손재주가 좋아? 대단하다! 역시 언니는 꼼꼼해."

어릴 적 힘든 문제가 있으면 늘 영주를 찾던 동생들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영주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돈이 오류가 난 거야. 돈이 문제인 거야.'

영주는 돈이 그런 거라고, 절대 본심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영주는 먼저 사과를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걸 사과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 간호하는 게 힘들다고 투덜댄 것 아니면 미주의 말에 격하게 반응한 것 둘 다 아니었다. 1년 전 그 일을 생각하면 미주의 비수 같은 말들에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도 1년 간 아무 연락도 없는 미주, 어떻게든 상황을 좋게 풀어보려고 애썼던 영주의 연락들을 모조리 무시했던 진주가 너무나 야속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전화를 걸었는데 한 번을 안 받고. 이 정도면 연을 끊자는 건가.'


영주가 저녁 요리를 하는 데 거실에서 다정이와 혜성이가 놀다가 다투었다.

"칫. 너랑 안 놀 거야!"

"흥. 나도 누나랑 안 놀아!"

그러고 10분 뒤에 보니,

"큭큭큭. 혜성아, 이것 봐. 너무 웃기지? 재밌지?"

둘은 울어서 눈은 빨개진 채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다정아. 다정이는 방금 전에 혜성이랑 안 놀겠다고 화가 나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먼저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야?"

"응. 그때는 기분 안 좋았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엄마도 봐봐. 너무 웃기지 않아?"

다투고 나서 먼저 말을 거는 것, 그걸 또 웃으며 받아주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 같았다. 어쩌면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성숙한 것 같았다. 

'난 지금도 미주, 진주를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지 못할 거 같은데.'

영주는 어릴 적 미주, 진주와 용돈을 모아 맘모스빵을 사서 셋이 나눠 먹으며 행복해하고, 하굣길에 마주친 개들이 무서워서 손잡고 큰소리로 저리 가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함께 의지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휴. 어른이 될수록 왜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아지는 거 같지.'

  

  



이전 08화 무기가 없는 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