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미주, 진주와 다툰 뒤로 일 년 넘게 연락을 끊겼다. 다툰 그날 영주는 수도 없이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자가 오고 가던 가족채팅방도 일 년 넘게 조용했다. 영주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관계를 다시 풀고자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영주는 일 년에 두 번,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때 본가에서 동생들 얼굴을 보지만 예전처럼 살갑게 다가가 얘기하는 일은 없었다. 서로 다른 친척들과 얘기하고 아이들 챙기다가 가는 정도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영주는 아직도 일 안 다니는 거지?"
제사 때마다 안 빠뜨리고 물으시는 고모의 말에 영주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늘 불편했다. 고모는 미주, 진주는 애들 키우느라 일하느라 고생하는데 영주는 집에서 쉬면서 제일 편하게 지낸다는 것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육아도 만만치 않게 고된 일인데.'
"네. 아이들도 어리고 돌봐주실 분도 없으니 제가 해야죠."
육아를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말하는 느낌이라 다르게 얘기하고 싶지만 마땅한 답도 없어서 늘 같은 대답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주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 이 뿌듯함이 고모에게는 그저 철없게 느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전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힘들 때도 있지만 서로 배우고 투닥투닥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을 구하면 구할 수도 있는데 저는 육아를 선택한 거예요.'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싶은데 도무지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주 넌 좋다. 집에서 애들만 보면 되고 좋겠어."
매년 두 번씩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얘기하시는 고모의 말은 미주와 민주, 그리고 다른 친척들이 다 있는 데서 들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영주 애들도 열심히 키우고 있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걱정 마셔요! 고모님."
영주 남편 윤석이 다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는 저번 영주 할아버지 제사에도 윤석이 고모에게 똑같은 대답을 했던 게 떠올랐다.
"고마워. 오빠."
"뭘. 사실인데. 애들 케어하는 것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잖아."
영주 주변에는 대부분 미주와 민주를 비교하는 이들이 가득한데 다행인 건 유일한 내편이 있었다. 바로 남편 윤석. 든든한 지원자이자 늘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영주가 육아로 힘들어하거나 고민들로 지쳐할 때면 늘 용기를 주었다.
"영주야. 애들이 지금까지 건강하고 밝게 잘 자란 건 다 네 덕분이야. 네 덕분에 나도 애들 신경 덜 쓰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 너무 고마워."
"육아하면서도 영주 네가 잘할 수 있고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신문 보는 것도 좋은데 어때? 나 주식 공부하는데 너도 같이 할래?"
영주는 홀로 외로울까 봐 지칠까 봐 여러 가지 생각을 해 주는 윤석이 너무나 고마웠다.
영주는 윤석의 말대로 매일 아침 6시면 신문을 보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윤석과 함께 주식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시작했는데 매일 읽다 보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하며 아등바등 지냈던 영주에게 여유를 갖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지금 무얼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효율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신문과 명상은 영주에게 에너지를 주는 하루 시작 루틴이었다. 영주는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도전하면서 스스로 단단해짐을 느끼고 일상을 가꾸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걱정하고 조바심 느끼고 자책하는 나쁜 습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그래. 이걸로 충분해. 나 스스로 단단해지면 아무 문제없어.'
매일 아침 명상을 하며 이 말을 되뇌곤 했다.
영주는 자신이 소설책을 좋아하는지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책이라고 하면 늘 자기 계발 책만 읽으며 밑줄 긋고 따라 하기 바빴었는데 아침 시간이 생기고 난 후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소설책을 읽다 보니 다른 세상에 사는 주인공의 삶에 푹 빠져 함께 경험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고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 같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족들과 나눌 이야기의 폭도 넓어졌고 좀 더 풍성해져 갔다. 소설책을 읽기 전과 후의 영주는 그대로지만 영주가 사람들을,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들, 순간들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영주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있음을,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소소한 일들을 실천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나를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히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