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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Mar 22. 2023

시간이 약이다

"카톡."

영주의 가족채팅방에 오랜만에 알림 문자가 왔다. 영주 아버지의 포도 하우스 간판 사진이었다. 아버지가 간판이며 글자체며 직접 만들고 그림까지 그린 멋진 간판이었다. 퇴직 후 새롭게 시작하는 포도 하우스에 드디어 이름이 생긴 것이다. 담쟁이 농원.

며칠을 고민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담쟁이처럼 잘 타고 올라가 넝쿨넝쿨 속이 꽉 찬 포도가 열리게 해 달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었다. 사고 후 조금씩 회복하시더니 지금은 많이 나으셔서 포도 농사에 열정을 쏟고 있다. 60세가 훌쩍 넘은 나이지만 블로그와 유튜브를 보며 학생처럼 필기를 하고 포도 농사에 대해 공부를 하며 매일 포도 하우스로 출근 도장을 찍으셨다. 

영주가 오랜만에 부모님 뵈러 갔던 날 영주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간 해놓은 작업들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빠 아무도 못 말려. 뭐 하나에 빠지면 끝을 봐야 한다니까. 대단해. 하우스 가서 봐라. 거기 집보다 더 예쁘게 꾸미셨어. 깔끔 깔끔 세상 깔끔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영주 아버지도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여 한참을 얘기하느라 영주는 30분을 내리 듣고만 있었다.

영주 아버지는 30년 넘게 공무직에서 일하면서 몸에 밴 생활 습관들이 퇴직 후에도 여전히 남아 계셨다. 허투루 쓰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고정된 루틴으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신다. 직장 생활하시면서 주말마다 했던 마늘, 당근 농사를 싹 갈아엎으시고 거기에 하우스를 새로 짓고 포도 농사를 시작하면서 제2의 직업이 되셨다. 영주가 몇 달 뒤 하우스에 갔을 땐, 처음 가서 밭에서 돌 줍던 때와 너무나 달라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너른 밭에 돌과 흙만 있었던 곳이 커다란 멋진 하우스 안에 초록초록 싹들이 올라와 있고 스프링클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옆에 공간에는 세면장, 소파, 탁자까지 있는 편의 시설이 있었다. 매일 아침 하우스로 출근하시면서 조금씩 만드셨다고 했다. 농사는 인내를 갖고 꾸준히 가꿔나가야 한다던데 이렇게 멋지게 만드신 걸 보니 영주 아버지의 꾸준함과 열정은 세상 모든 걸 가능하게 할 것만 같았다.

"너무 멋져요! 담쟁이 농원에 맛있는 포도들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어요!"

영주는 아버지께 개인톡으로 할까 하다 그냥 가족채팅방에 오랜만에 답문을 적어서 보냈다.

30분 뒤 미주가 영주의 문자에 좋아요를 눌렀고 개인톡으로 미주한테서 문자가 왔다.

'미주가..?'

"지은이 작아진 옷 엄마네 집에 뒀는데 가져갈래? 다정이 입으면 예쁠 것 같아서."

다툼이 있기 전에 영주, 미주, 진주는 아이들 옷, 신발을 서로 대물림하며 입혔었다. 한동안 뜸하다 미주는 딸 지은이가 입고 작아진 옷을 다정이에게 주려고 부모님 댁에 뒀다. 영주는 1년을 말없이 지내다 갑작스러운 미주의 문자에 당황스러웠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답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하지 한참을 고민하다 영주도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사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토록 미웠던 감정도 줄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라던데 영원히 남남으로 지낼 수는 없잖아.'

선뜻 내어준 용기에 영주도 용기를 내었다.

"알겠어. 고마워."

그 뒤로 미주는 가끔씩 아이들과 근처 좋은 곳을 다녀와서 찍은 사진을 보내며 다정이와 혜성이랑 가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영주는 미주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엊그제 집에 다녀왔는데 아빠 혼자 밥 드시더라고. 엄마랑 싸우셨나 봐. 엄마한테 요리법을 바꿔보라고 했는데 아빠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시면서 전혀 바뀔 생각이 없다고 아빠가 그러시더라고."

"이제 아빠도 요리도 하시고 스스로 밥을 차려 드셔야지. 엄마한테만 바뀌라고 하시면 안 되지."

"그건 맞아. 넌 고기 구울 때 어떻게 구워?"

"난 오븐에 굽는데."

"나 요번에 에어프라이기 샀는데 신세계야. 정말 좋아."

영주와 미주는 카톡에서 어느새 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영주는 미주, 진주와의 다툰 아픈 기억들이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서로의 입장이 안되어 봤으니 그럴 수 있어.'

시간이 약이랬다.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과 아픔이 무뎌진다. 다툰 감정은 없어지지 않겠지만 영주는 기억이 희미해지는 만큼 잊어버리기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이해가 안 되는 거면 안 되는 대로. 미주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을 건네듯 들춰내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꺼내서 더 이상 멀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 이 사이. 영주는 미주와의 지금 이 사이가 너무도 좋았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애매한 사이. 어쩌면 그날 그 다툼도 서로 너무 가깝다 보니 서로 기대하는 게 커지고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 게 아닐까. 서로를 간섭하기에 가깝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딱 이 사이가 어쩌면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사고, 영주와 미주의 다툼 모두 시간이 약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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