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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y 19. 2019

생각의 일기 7주차

2019.5.11. ~ 2019.5.16.

2019.5.11.(토)

-<글쓰기의 태도>, 에릭 메이젤

정직한 제목이다. 글 쓰는 사람, 더 구체적으로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실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책. 문예 창작을 전공으로 삼지도 않았고, 조언을 해줄 마땅한 누군가도 없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책이야말로 ‘계발서’다. 곳곳에 뼈를 때리기도 하고, 뼈와 살이 되기도 하는 문장들이 빼곡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뜨끔하게 만든 대목의 소제목은 이렇다. “중립적 글쓰기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아무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늘 행복하고 소소한 이야기만 하고 싶어서 순진한 척 연기할 수도 있다.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라. 그럴 때조차 당신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진짜 생각을 숨기는 게 목표라면 왜 굳이 위험하게 독자들과 관객들이 우글거리는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뭔가 쓰려고 했다면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을 써라.


한정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감정 소모에 쏟고 싶지 않으니까, 어쩌다 면전에서 욕이라도 먹으면 계속 신경 쓰이고 피곤하니까, 괜히 분위기 싸해지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종종 비겁한 침묵자가 된다. ‘일기’라는 이름으로 이런 글을 쓸 때조차 서슬 퍼런 자기 검열은 그칠 줄을 모른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생각한 것에 대해서 쓸 때는 과대포장하거나 윤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발언하는 용기, 혹은 뻔뻔함이 필요한 것 같은데. “완벽한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 문장을 옳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중립적 삶이란 실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삶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글 또한 중립적이면서 좋을 수는 없다. 글쓰기야말로 ‘미움 받을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행위라는 것, 솔직하고 힘 있는 글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 그런 것들을 부쩍 자주 생각한다.  





2019.5.12.(일)

-‘봄날’, 이문재


<시 읽는 법>이라는 책을 읽다가 발견한 시. 나의 계절과 시의 계절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전율을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느낀다.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칼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 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계간 『시작』 (2011년 여름호)





2019.5.13.(월)

-<시 읽는 법>, 김이경


오른손에 두 개의 반지를 끼고, 여간해선 벗어두는 일이 없다. 하나는 엄마가 사주신 무난한 디자인의 반지, 또 하나는 ‘Carpe Diem’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반지. Carpe Diem은 라틴어이며, 영어로 다시 쓰면 Seize the day가 된다. 즉, 오늘을 즐기라는 뜻.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속삭인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졌다. 그는 나의 멘토이기도 하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니까. 그런데 그의 지론 중 미처 체화하지 못한 게 있다. 키팅 선생이 더없이 사랑했던 대상, ‘시’다.


시를 읽는다는 건, 다른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이 인류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인류야말로 열정의 집합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의학, 법률, 금융,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시, 낭만, 사랑, 아름다움이 세상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中, N.H.클라인바움)


요약하자면 사람이니까 시를 읽는다, 사람들의 삶의 양식(혹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시를 읽는다, 정도. 한창 이 영화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대사였다.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도 책은 곧잘 읽었지만 시집은 굳이 찾아 읽지 않았다. 국어 시간에 밑줄 긋고 이 시어에 함축된 의미, 행과 열, 작가의 의도 따위를 찾아내는 게 시 읽기인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시가 삶이 된다? 국어 점수가 아니라?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문학을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웠다.


그러니 시집을 펼쳐 들면 마치 아직 한글을 제대로 깨치기 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책을 앞에 두고 당황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때문에 보들레르의 <악의 꽃>, 기형도 시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리고 허수경과 윤동주의 시집이 읽히지도 못한 채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다. 특단의 조치로 <시 읽는 법>을 읽었다.


저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독자에게 시 읽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그 중 단 하나의 실마리만으로도 오랜 시 무식자 상태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겠다는 자신을 얻었다. 시는, 섬세한 언어와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들의 글이라는 것. 대상과 순간을 포착하여 고르고 고른 언어로 자신이 본 바를 최대한 왜곡 없이 전하고자 하는 노력(왜곡 없이 전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는 거, 정말 의미심장하다. 돌직구와 사이다가 모든 일에 능사는 아니다). <시 읽는 법>의 저자는 시를 이렇게 안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이것 좀 보세요.” 하며 독자에게 시인 자신의 위치에 서기를 권할 때 기꺼이 그 위치로 가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독자인 나의 반응은 시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와 멋지네요, 혹은 음 저는 잘 모르겠어요, 혹은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등등.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좋아한다. <시 읽는 법>을 읽고, 이제는 적어도 시를 눈앞에 두고 무얼 해야 할지는 아는 사람이 되었다. 뭘 해야 하냐고? 섬세한 언어와 섬세한 눈으로 직조된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세계를 허우적거려 보기. 그리고 다시 한 번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겠다. 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겠지.





2019.5.14.(화)

-4.16재단 (http://416foundation.org/)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4.16재단의 정기후원 요청 전화였다. 4월 16일자 <생각의 일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4.16 재단의 정기후원자가 되었다. 이것으로 내가 할 일을 끝냈다, 가 아닌, 앞으로도 꾸준히 고통의 곁의 곁에 서겠다는 작은 의지의 표명으로써.





2019.5.15.(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네가 그 때 그랬잖아.”라고 시작되는 그 이야기가 정작 당사자 머리에선 말끔히 지워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엔 특히 기억능력자들이 많은 것 같고, 나는 특히 스스로의 말이나 행동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축에 속한다. 일상의 파편 하나하나를 주변인들에게 아웃소싱하여 맡겨두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내가 요구한 적도 없고,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이상한 거래. 그들은 대체로 이야기 말미를 이렇게 장식한다. “아, 내가 이런 걸 왜 기억하고 있지.” 기억할 이유가 없는 세세한 것들을 저절로 기억하는 뇌. 가끔은 그 기능이 부럽다가도,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뇌는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의식에 밀어 넣지도 못하고 기억 조각들을 움켜쥐고 있을 뇌. 윈도우 운영체계로 따지면 무수히 많은 프로세스 목록이 있는 작업관리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어떤 기억은 꼭 작고 날카로운 면도날 같아서, 무심결에 스쳤다가 마음을 베게 되기도 한다. ‘잘’ 기억하고 ‘잘’ 잊는 게 마음먹은 대로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는 걸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다. 때로 나는 그 앎이 주는 연대감에 기대어 타인의 아픔(기억과 망각에서 오는 아픔)을 겨우 이해해보게 된다.


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읽고 있다. <소설가의 일>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재독’도서이다. 그러나 초등학생 때 완독한 후 지금 집어 들었으니 다시 읽는 것 같지가 않고 그저 새롭기만 하다. 특히 소설의 초반부, 주인공의 유년시기에 대한 부분은 작가의 기억력과 묘사력이 새삼 감탄스럽다. 책을 잠시 덮고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을 열심히 떠올려 봤지만 별로 건져낼 만한 게 없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토록 생생할 수도 있다니. 격동의 시기를 살아내신 기억들, 그 기억들을 품고 산 작가님의 세월이 여간 무겁지 않으셨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잊기 위한 기록들일지도.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의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지고자 했던 노력이었을지도. 그건 글쓰기가 인간에게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이라 할 수 있겠다. 잘 잊고, 잘 기억하기 위한 글쓰기.





2019.5.16.(목)

-<복잡계 개론>, 윤영수 채승병


책장에 복잡성 이론에 관한 책이 많은 것은 순전히 내가 그 이론으로 석사학위논문을 썼기 때문이다. 주제는 거창했다. 복잡성 이론이 주는 함의를 어떻게 현대 교실 속 교사 역할에 적용할 수 있을까. 복잡성 이론은 사실 카오스, 네트워킹 등 자연‧이공계에서 주로 다루는 분야라, 교육철학 전공의 뼛속까지 문과 석사과정생에게는 지나친 주제 선정이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논문을 완성하고 무사히 졸업을 했지만, 논문 내용은 졸업 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교수를 고문하려거든 석사학위 논문을 면전에서 읽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괴롭힘이다.


그러나 요즘 부쩍 내가 쓴 논문의 내용을 재평가하게 된다. 앗,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었을지도 몰라. 역시 들여다 볼 용기는 아직 나지 않지만 단편적인 기억들에 의존하자면 그렇다. 왜냐하면 사회환경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논문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대강 이런 것이었다. 현재의 공립학교는 인류 근대화의 산물이며, 근대식 학교가 만들어질 때와는 확연히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통적인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교육 혁신 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그러니 교사는 이제 교수자가 아닌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일대다 강의식 수업도 처음부터 재검토되어야 한다. 복잡한 상호작용이 교실 내에서 일어나 구성원 모두가 변화될 수 있는 창발 지향적 수업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것들. 논문을 쓸 당시엔 플립러닝이나 무크 등 온라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교육과정, 전자칠판이나 태블릿과 같은 기기 도입이 이렇게까지 활성화될 줄 몰랐다.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내용들이 아닐까, 쓰는 내내 의심하고 회의했다. 덕분에 체내 수분이 바싹 말라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이 내용은 더 이상 뜬구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부끄럽던 글이 한 순간에 자랑스러운 글로 둔갑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아마 문장도 엉망진창일 것이다), 그래도 좀 위안이 된다. 지금 당장 옳거나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영화 제목이 하나 떠오른다.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 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씀. 영원한 건 없다. 그저 후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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