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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y 29. 2019

생각의 일기 8주차

2019.5.18. ~ 2019.5.23.

2019.5.18.(토)

-<KBS 스페셜: 오월, 그녀>(2018)


작년에 처음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보았던 건 순전히 ‘임을 위한 행진곡’ 때문이었다. 보수정권이 ‘감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그 노래가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장에 다시 울려 퍼지는 광경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석한 이들은 너도나도 손을 맞잡고, 또는 주먹을 힘차게 흔들며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노래를 불렀다(물론 동참하지 않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짧은 제창이 끝나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그 풍경은 내게 일종의 선언처럼 보였다. 국가의 폭력에 짓밟혀야 했던 광주의 아픔을 정부가 나서서 다시 돌보겠다.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태도를 9년 전으로 되돌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올해도 기념식을 보았다. 대통령은 기념사를 말하던 중 울먹였다. 광주에 미안하다고 했다. 첫 해 기념식서 공언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있었고, 5.18에 대한 소설 같은 망언들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올해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작년과 달리 모두 주먹 쥔 팔을 힘차게 드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덕분에 올해의 제창 역시 작년과 마찬가지로 내겐 일종의 선언처럼 보였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움직이려 하는 자들을 관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면 기꺼이 싸울 것이다.


기념식이 끝나자 KBS1에서는 작년 제작‧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던 다큐 <오월, 그녀>를 다시 방송해준다고 했다. 작년에 보겠다, 보겠다 벼르고는 새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 일이 아니면 이렇게나 잘 잊는다. 다소간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큐를 보았다. 거기에는 그 때의 광주를 치열하게 살아낸 여성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숨죽인 채 살아왔던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총 드는 것만 빼고는 다 한” 여성들의 투쟁사 앞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숙연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간 나는 광주 사람들의 아픔을 그저 아는 체만 해온 것은 아닌가. 아직도 이렇게나 모르는 게 많다. 그리고 그걸 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보다 더 모르는, 아니 잘못 알고 있으면서 잘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어떤 이들이 오늘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부산 갈매기’를 부르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대신 부끄러워야 하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사건의 진상이 사실대로 우리의 역사에, 누구도 흔들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자리매김하려면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때까지 피해자와 유족, 약자의 편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좋겠다.




2019.5.19.(일)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화자들은 모두 어딘가 텅 비어 있다.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있어 그 사이로 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들은 sns를, 섹스를, 자해를, 자살 시도를 한다. 그런 것들로 구멍을 메워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인물의 삶만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전체가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다. 어쩌면 이미 세계가 그 지경이기에 인물들의 삶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갖은 상처로 이제 웬만한 좌절은 헛웃음으로 넘길 수 있게 무뎌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만 정리하면 무척 어둡고 막막하게 기억되겠지만, 작가는 독자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뜨린다. 아이러니한 웃음이 소설의 곳곳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모든 것을 초탈한 자의 콧방귀 같은 이 차가운 웃음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고 소설을 빠져나온 후엔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다. 내가 그 인물들과 뭐 그리 다른가.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게 비옥하고 넉넉한 마음상태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팔과 팔 사이로 찬바람이 마구 지나가는 어느 날, 문득 맥락 없이 떠올라 곱씹게 될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는 있다.




2019.5.20.(월)

-<카모메 식당>(2006)


언젠가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가 트위터에 썼던 글을 지금도 금언처럼 마음에 두고 있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세계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간다.

(출처: https://twitter.com/imagolog/status/100578808029118464?s=20)


며칠 전 <카모메 식당>을 보며 윗글을 떠올렸다. 타국에서 연 식당,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손님이 없어도 식탁을 닦는다. 내부의 정갈함을 유지하고, 유리창 너머 의뭉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이들에게도 미소로 답한다. 식당 밖에서의 삶도 다르지 않다. 외부 요인에 영향 받지 않고 루틴을 유지하는 생활. 그녀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당을 방치하지 않고, 동일한 이유로 자신만의 삶을 유예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잘 꾸려가는 삶’에는 결국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동료가, 손님이, 이웃이, 아주 천천히 카모메 식당에 찾아든다. 영화는 이 과정을 정갈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세계는 결코 비좁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넓게 확장되어 갈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게 어려우니 문제지. 어쨌든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난 오늘도 글을 쓴다.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는 순간이 오지 않도록.





2019.5.21.(화)

-<시사IN> 610호


“당신이 노무현입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잡지를 바라보는 이를 어렴풋이 비추는 표지(사진의 회색 부분이 실제로 보면 번쩍번쩍거린다). 이 표지 하나 때문에 <시사IN>을 샀다. 그가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다.





2019.5.22.(수)

-부산1호선 동매역 에스컬레이터



집 근처 지하철역 입구엔 계단이 없다. 선택지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두 가지 뿐이다. 엘리베이터는 조금 더 걸어야 하고 내려가는 속도가 느리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선호한다. 그런데 이 에스컬레이터의 단점은 ‘좁다’는 거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딱 붙어 있고, 각각의 에스컬레이터 폭도 겨우 한 사람이 설 수 있을 정도다. 문제가 되는 건 출근시간이다. 마음 급한 직장인들은 걷거나 뛰려고 하고, 연세 지긋하신 분들께서는 가만히 서 있고 싶어 한다. 서 있고 싶은 사람들은 뒷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 좁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몸을 살짝 한쪽으로 옮겨주기도 한다. 정말 급한 사람들은 그 즉시 틈을 파고들어 아래로 내달린다. 빨리 움직일 수 없는 자를 뒤에 남겨두고 기어이 그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하는 보통의 사람들. 우리 사회를 어쩜 이렇게 잘 표현하는 풍경인가, 생각하며 좁은 에스컬레이터에 가만히 서 있었다.





2019.5.23.(목)

-2019 부산국제연극제 <광대들의 집>


애니메이션, 하면 흔히 ‘동심의 세계’ 따위를 떠올리지만 사실 애니메이션과 같은 비 실사 영상에는 잔인한 장면들이 훨씬 많다. 잔인함을 극대화하여 보여주지 않을 뿐이지. 예를 들면 <톰과 제리>. 둘의 싸움을 실제로 본다면 무척 잔혹할 것이다.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가격하고, 높은 데서 추락하고, 몸에 불이 붙기도 한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생명이 위협받을 만한 일인데,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장면에서 웃는다. 왜? 내 일이 아니라서? 경쾌한 음악과 연출로 포장을 잘 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극중에서 피해를 입는 그들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게 크다. 사람이나 동물 등의 생명을 직접 등장시키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인 것이다.


부산국제연극제 초청작 중 유일한 인형극이었던 <광대들의 집>은 그러한 장점을 십분 살렸다. 즉, 등장인물들을 잔인하게 다룬다는 뜻이다. 한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내에 여러 개의 단편적 이야기를 선보이는데, 모두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도 그냥 죽음이 아니다. TV를 통해 모든 욕구를 해소하는 남성은 TV에게 살해되고, 무성의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 여성은 가전제품에게 살해되는 식이다. 하지만 죽기 전의 모습에도 생기는 없다. 인형들은 모두 눈에 초점이 없고, 얼굴은 부은 듯 살쪄있다. 이제 등장인물의 그런 모습은 현대인의 삶을 그려내기 위한 전형적인 장치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 죽음을, 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변 환경과 사회의 변화에 끌려 다닌 결과로 이해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난 후 아티스트 토크를 들으며 심경이 무척 복잡해졌다. 이 연극의 제작자이자 퍼포머인 두 사람은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처벌(punishment)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즉, 그들이 집착(obsession)하는 대상이 그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TV가 죽인 그 남성, 돈을 토해내며 죽은 남성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이다. 그렇다면 집안일만 하다 아이를 두고 죽어버린 여성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말 그녀는 집안일에 집착을 보인 것인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을 묵묵히 듣고 있다 머리에 불이 붙어 죽는 남성은 또 어떤가. 그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다소 동의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아티스트 토크는 지나치게 짧았다. 연극도, 연극제도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원작자의 답변이 언제나 항상 옳고, 명확한 것은 아님을, 오늘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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