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5. ~ 2019.5.30.
2019.5.25.(토)
-<김상욱의 양자공부>, 김상욱
이것은 일종의 고투다. 양자역학, 혹은 과학 그 자체에 무지몽매한 이들을 위해 어떻게든 쉽고 유머러스하게 양자역학의 정수를 설명하려는 고투. 그럼에도 양자역학 자체가 뉴턴 역학, 즉 현 세계의 물리 법칙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움직이는 세계라 직관적으로 와 닿지는 못한다. 저자의 노력으로 겨우 맛만 조금 볼 수 있는 정도랄까. 다행히 이 책 역시 독자에게 “이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다”고 안심시킨다.
사실 저자는 책 외에도 과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학의 참 맛을 알리려는 노력을 많이 해 온 사람이다. 부산대 재직 시절인 몇 년 전 스스로 페이스북을 통해 수강생을 모집했던 일반인 양자역학 강좌도 그 일환이었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몇 번 그 수업을 들었다. 오래 전이라 많은 것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시도 자체가 대학원을 거친 내게는 대단해 보였다. 교수라는 직업 역시 ‘성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논문 한 편 당 몇 점, 단행본 한 편 당 몇 점… 따라서 교수 성향에 따라 성과에 포함되지 않는 과외 활동을 등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분은 예외였다. 일반인 대상으로 스스로 무료 강좌를 연다 한들 학교에서 칭찬하거나 예외적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을 텐데도 수업을 여시고는 참 성실히 가르치셨다. <김상욱의 양자 공부>를 읽으며 몇 년 전의 그 수업이 떠올랐다. 대중서 역시 학계에서는 그 가치가 절하되는 분야인데, 그럼에도 꾸준히 <김상욱의 양자공부>와 같은 책들을 쓴다. <알쓸신잡 3> 출연과 ‘엔트로피 사랑’ 같은 도전(?)도 위와 동일한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학계와 대중적 시각 사이의 괴리, 시간차였다. 학계에서는 이미 A라는 이야기를 닳도록 하고 있는데, 하도 이야기해 닳아 없어질 때쯤 EBS의 다큐 프로그램에 A 이론이 소개되어 사람들의 반향을 끌어내곤 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게 학문의 생리일까. 그냥 원래 그런 것이니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일인 걸까. 정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누군가는 그 시간차를 줄이는 통로 역할을 해야 할 것인데, 현재까지는 김상욱 교수 같은 분들이 그 역할을 개개인의 역량을 이용하여 담당해가고 있다. 그런 분들이 모여 하나의 플랫폼을 형성하기도 하고. 이런 행보는 마땅히 박수 받을 만하다. 이분법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가히 양자역학 전문가답기도 하고.
2019.5.26.(일)
-<그날들>(2019)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더 좋게, 더 재밌게 보았을 것이다. 남성과 남성의 뜨거운 우정, 그리고 가슴 아픈 결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 보고 나온 후에도 여운에 젖어 벅차올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중심 서사가 그렇게까지 좋지 않다.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가 자꾸만 걸려서.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낸 것만 같은 여성 캐릭터가 그다지 와 닿지 않아서. 그래서인지 나는 극의 1부에서 몰입하지 못하고 계속 주춤거렸다. 그런 나, 관객 1을 잡아 둔 건 극 전체의 핵심이기도 한 ‘김광석의 음악이 가진 힘’이었다. 극의 짜임새가 전반적으로 훌륭하고 배우들 역시 흠잡을 데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음악의 매력이 극대화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한 가지 마음에 계속 남는 점은, 차정학이 김무영에게 가졌던 오해의 마음이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로 끝난다는 것. 둘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결정적 동기가 사실은 차정학의 오해였다는 건 관객들만 알지 등장인물은 모른다. 그는 그저 옛날의 직장동료를, 그와 함께였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날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회한에 잠길 수 있을 뿐이다.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닐지 모르나,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2019.5.27.(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어제 <그날들>을 보며 영 개운치 않았던 뒷맛을 곱씹다 문득 한 영화가 떠올라버렸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테리 길리엄 감독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영화인데, 올해 5월 말에 국내 정식 개봉하여 약 5,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작년에 이 영화를 본 직후 역시 개운치 못한 텁텁한 뒷맛을 느끼고 휘갈겨놓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다시 읽으니 <그날들>과 의외로 연결 지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그 글을 옮겨 본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피셔킹>을 좋아한다. 성배 이야기에 빗대어 현대인의 무관심과 소외, 사랑을 다룬 훌륭한 영화라고 늘 생각했다. 이후 감독의 다른 작품들은 이상하게 잘 보게 되지 않았는데, 올해는 또 이상하게 갑자기 감독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그 유명한 돈키호테 이야기 아닌가. 최근 나의 화두인 김영하 작가의 책 <읽다>에도 돈키호테 이야기가 큰 비중으로 등장한 바 있다. 즉, 일단 한 번 꽂혔다면 안 볼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영화, 보면 볼수록 80년대 영화인 <피셔킹>의 서사와 유사한 지점이 무척 많다. 몇 가지만 읊어 보겠다. 하나, 주인공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던 도중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린다. 둘,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우연히 피해자와 만나 엮이게 되지만, 이미 피해자는 사건 이전의 인간이 아니다(일종의 정신병리적 현상을 겪고 있음). 셋, 실제와 환상 사이를 오가는 좌충우돌 스펙터클의 향연 속에서 두 사람은 스스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실에 가닿게 된다. 안타깝게도 여성을 성녀(까진 아니지만 꽤 이상적인 여성) 혹은 악녀(라서 악녀가 아니라 남성을 유혹하기에 악녀가 되는 여성)로만 평먼적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놀랍도록 같다. 이처럼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감독 자신의 손에 익은, 익숙한 재료들을 다시 한 번 요리한다. 만약 이 성취에서 영화가 멈춰버린다면 그 자체로 답습이자 게으른 것이고, 그렇기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피셔킹>에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하며, 나는 그것이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고단함’이라 느낀다. 감독 자신이 오랜 세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지내며 느낀 영화 제작주체와 관객에 대한 소회를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빌어 극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러닝타임 내내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구성하는 자이며, 돈키호테 역을 맡아 정말로 돈키호테가 되어버린 또 다른 주인공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믿어버리는 자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트러블이며, 따라서 그 거대한 트러블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과 그 이야기에 신뢰를 쌓고 몸을 맡기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인 피로감이 따르게 된다. 이윽고 이야기를 열렬히 따르던 자가 죽게 되고, 그 혼은 다시 이야기를 만들던 이에게로 전이된다.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사라졌을 때, 이야기는 다만 만든 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뿐이라는 것을 알리듯이.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되돌아온 이야기를 온몸으로 받아버린 주인공의 삶은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끝없이 이야기의 안과 밖으로 궤도를 그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도,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예술인생도, 당분간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2019.5.28.(화)
-‘사람들 2019’, 정태춘
이 사회는 여전히, 이 사회를 이렇게 바라보고 노래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침 현관 앞에 사채 업체 명함들이
여기 저기 뿌려져 있고
이사 온 첫날 나는 기겁을 하고, 허어..
오후에야 겨우 가슴 쓸어내리고
온 동네 거리마다 낙엽처럼
흠, 일수, 월수, 해피론, 무담보, 전화 한통으로..
동네 할머니 손수레 지나가고
동네 할아버지 리어카 끌고 오고
종이 박스 가득 아슬아슬
비탈진 언덕길을 내려가고
흠, 노인을 거지로 버려 두는
흠, 사람들
(중략)
재작년엔
4,185 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12,463 명의 국민이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하청, 비정규직.. 1,957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여기 또,
35만의 새 아기들이 태어나고
1만 여 명의 신부들이 중국, 동남아에서 들어오고
JTBC에 노란 조끼 등장하고
샹젤리제 거리는 철시하고
장갑차에 검은 연기 어수선하고
뉴스 꼭지는 넘어가고
아, 아쉬운 사람들
음, 사람들 (가사 중)
2019.5.29.(수)
-<젊은 작가에게 바치는 편지>, 칼럼 매캔
이런 책을 꾸준히 읽는 건 노하우를 더 얻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인지,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이 글은 읽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인지가 매 순간 의심스럽다. 격려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 누구도 격려해주지 않을 때 이런 문장들이 큰 도움이 된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괜찮다, 지금 당장 백지를 너의 문장으로 채워라. 훌륭한 당근이다. 영원히 이 책을 읽을 수는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 나는 나를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데 서투르다. 스스로에게 채찍만 휘두를 줄 알지 채찍에 맞은 상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른다. 스스로에게 가혹하지 않기가, 아니 한 번 굳어진 심리적 습관을 바꾸기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만큼 어렵다. 역시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젊은 작가에게 바치는 편지>와 같은 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겠다.
2019.5.30.(목)
좋은 글을 많이 읽을수록 후진 글을 쓸 확률이 낮아진다. 반대로, 좋은 글을 많이 읽지 못했을 땐 글이 자꾸 후져진다. 최근에는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워낙 잘 나지 않는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원활하지 않아 만족스러운 문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러려고 글을 쓰나, 자꾸만 자괴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