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1. ~ 2019.6. 5.
2019.6.1.(토)
-<공존과 지속>, 이정동 권혁주 김기현 장대익 외
석사과정 시절 지도교수님은 내 문체가 지나치게 ‘구어체’라며, 보다 논문에 알맞은 문체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셨다. 그 누구도 논문스럽게 쓰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일러주었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쓴 논문을 읽으며 감을 잡아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대학원에서 글 쓰는 방법 따위를 하나하나 가르쳐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곳도 직장과 똑같이 ‘알아서 해 나가는 수밖에 없는 세계’다. <공존과 지속>이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몇 년 전의 그 시절 내가 참고해나갔던 글들을 떠올렸다. 학문의 엄밀성과 체계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주었던 저작들. 사실 그런 글은 독자들에게 아주 친절한 편은 아니므로 가독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아쉬움을 느끼는 지점도 동일하다. 대화 혹은 좌담을 글로 옮겨놓은 부분들은 토론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으나 저자들이 각자 쓴 짧은 글은 다수를 대상으로 한 글이라기에는 조금 딱딱하다. 개인적으로는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너무 오래 이런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다가온 것일지도.
전공뿐만 아니라 직업 역시 여전히 교육과 관계되어 있는지라 책의 원래 순서를 무시하고 교육 파트를 먼저 읽었다. <공존과 지속>은 어떠한 사안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결론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며, 오히려 다양한 학자의 시각을 병치하여 독자가 다각도로 한 분야의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교육은 특히나 사람마다 생각이 가지각색인 분야다. 그럼에도 의견이 통일되는 지점이 뚜렷했다. 미래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함에 따라 제도권 교육 역시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기술의 발전을 그대로 교육에 적용해서는 안 되며 ‘교육’의 본질에 대한 세밀한 고찰과, 그에 알맞은 교육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는 것, 이 모든 최선의 예측에도 앞으로의 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맞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
주어진 것이 아닌 주어져야 할 것,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한 공적인 숙고가 필요하다. 그 장에서 우리는 미래 수용자가 아니라 미래 형성자일 수 있다. (본문 중)
알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는 지금, 여기의 우리는 어쩌면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를 ‘공적인 숙고’를 이제라도 시작해야 할 텐데. 이해관계에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과연 생산적인 숙고를 할 수 있을까. 장밋빛 전망보단 회의감이 먼저 드는 게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지속적으로 경고하는 이상기후와 지구 환경의 파괴에 대해서도 코웃음을 치며 이익만을 고려하는 자본가들이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그 문제에 비하면 교육 분야에 산적한 문제들은 오히려 약소해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가 ‘에너지시스템의 전환’을 다룬 2부를 읽어보려 한다.
2019.6.2.(일)
-<택시 드라이버>(1976)
어떤 영화는 너무 잘 만들어져 있어 도리어 사랑하기가 어렵다. 연출이며 연기, 촬영, 음악, 조명 등이 감독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할 때, 그리고 그 세계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어두움을 품고 있을 때 관객은 기쁨보다는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예상은 했지만 <택시 드라이버>는 그런 영화였다. 사실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있는 영화들은 대체로 그렇다.
<택시 드라이버>는 백인우월주의자 주인공을 내세웠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 전반에 주인공 트래비스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이 영화를 볼 때와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를 바라볼 때의 심정이 흡사하다. 그의 눈에 흑인은 뉴욕을 더럽히는 존재이며, 매춘부와 불량배들은 싹 쓸어버려야 하는 존재이다. 거기에 주인공은 ‘확증 편향’을 더한다. 자신의 신념을 강화할만한 장면이라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모두 포착한다. 아이러니한 건 결과적으로 그가 성공시킨 두 건의 살인사건이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매우 정의로운 행동으로 비칠 거라는 사실이다. 가게를 털기 위해 주인을 협박하던 흑인을 쏴 죽였고, 매춘부들의 소굴에 침입해 포주와 사장을 죽이고 소녀를 구했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영웅적 면모가 부각된 신문 기사의 주인공이 되며 짝사랑했던 여성을 다시 만나 원 없이 멋진 척을 한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미 알게 되어 버렸다. 주인공의 마음에 여전히 크게 자리하고 있을 비틀린 욕망들을. 매정하게도 영화는 백미러에 비친 주인공의 눈빛을 통해 그 욕망이 건재함을 잠깐 보여주고는 끝나버린다.
보통의 도덕관념을 가진 관객이라면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에 감정이입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를 관찰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처벌을 받기는커녕(총을 몇 발 맞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살았으니 된 거 아닌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영화가 마무리되니, 영화가 끝난 후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이다. 왜 저 사람은 처벌이 아니라 칭송을 받는가. 이것이 온당한가. 저 여자는 또 뭐가 좋다고 저런 남자한테 다시 찾아가는 건가. 한 5분 정도 그런 상태를 겪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럴 수 있겠다’였다. 저 사람의 내면을 러닝타임 내내 온전히 따라붙은 존재는 영화 내에서 없다. 그는 고독하며, 원활한 상호 소통을 나눌 만한 이가 없다. 오로지 관객들만이 주인공의 모든 시도와 생각과 음험함과 어두운 면모를 하나하나 관찰했던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체험은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실생활에서 누군가를 관객처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실제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나의 모습이, 안티히어로에 가까운 주인공을 히어로 대우하는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뜻이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모습과 행위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고, 관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관객의 시점은 영화를 볼 때나 가능한, 일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그래서 관계가 어려운 것이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맹목적인 추종도 가능하고, 덮어놓고 비난하는 마녀사냥도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나 오류투성이인 관계망 속에서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같은 사람을 괜찮은 사람이라 오판할 가능성, 충분히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결코 오판한 이의 잘못이 아니다.
2019.6.3.(월)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제목 때문에 호기심이 동했던 소설집이라 표제작부터 찾아 읽었다. 분량이 길지 않아 금방 다 읽고는 당혹감에 빠졌다. 이게 진짜 끝? 처음에는 전자책이라서 오류가 난 줄 알았다. 뒷부분이 조금 잘린 것 아냐? 그런데 아니었다. 윤희는 그래서 왜 히잡을 쓰게 되었는지, ‘친절한 교회 오빠’ 민호를 만난 윤희는 왜 차갑게 식어버린 건지, 소설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끝을 낸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이야기의 열쇠라고 생각했던 질문이 힘을 잃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이걸 뒤집어 생각하면, 굳이 윤희가 히잡을 써야만 하는 이유, 민호와 윤희 사이에 있었던 일 따위는 작가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야기 거리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무엇인가. 제목은 또 왜 저런가. 소설을 다 읽고서야 질문을 바꾸어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약간 서늘해졌다. 윤희와 민호는 한 때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런데 둘 사이에 (윤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민호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겼고, 윤희는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민호를 보자마자 냉담해진 것이다. 하지만 민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소설이 다 끝나도록. 그게 무서운 거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지만 돌을 던진 이는 개구리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고, 언젠가는 자신이 연못에 돌을 던진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것이다. 그건 돌을 던진 이의 특권이다. 아프게 맞지 않았으므로 기억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더 무서운 사실은, 돌이 아니라 개구리의 건강에 좋은 무언가를 던져 개구리가 맞아 죽어버렸더라도, 던진 이는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되리란 것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선의는 때로 ‘선’을 잃는다. 아마도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씨는 대놓고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상대를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의 의에 취해, 혹은 그저 습관적으로 좋고 좋은 말들과 행동들을 남발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윤희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은 가능하지 않겠구나. 다만 그러지 않으려 애를 쓸 뿐이구나.’ 상처를 입히지 않는 삶은 애를 써도 어렵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친절하’기란 얼마나 더 어려울 것인가. 선의조차 선하게 전달하기가 어렵기 그지없는데. 결론적으로 이 소설의 제목은 역설이다. 그 누구도,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없다.
2019.6.4.(화)
과거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보았던 책이나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종종 뜨악해진다.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고 대상화하는 내용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했던 어떤 카툰 에세이,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담고 있는 어떤 유명 영화, 등등을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불편함’이 때로는 성장의 척도가 된다.
2019.6.5.(수)
-‘Sakura’, Oamul Lu
지난 4월 한남동 디뮤지엄의 ‘I draw’ 전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오아물 루 작가의 작품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림 속 인간은 자신의 반려동물과 함께 있다. 주로 강아지인데, 흰 강아지가 주인과 함께 절경을 신나게 산책하는 그림이 참 좋았다. 마치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집 하늘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그 그림이 엽서로 나와 있지 않아 최대한 비슷한 그림으로 하나 사왔다. 가끔 꺼내어 볼 때마다 하늘이 생각이 난다. 나의 첫 동물 친구 하늘이. 처음이 다 그렇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잘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서투른 가족을 만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래도 우리에겐 기쁨과 행복만 줬다. 그러니 착한(물론 한 성깔 했지만 성정은 착했다. 정말이다.) 하늘이는 분명 지금쯤 친구들과 함께 무지개다리 너머의 세계를, 저 그림처럼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우리가 만난다면, 그리고 그 때 하늘이가 허락한다면, 그냥 함께 걷고 싶다. 오아물 루 작가의 그림처럼. 그리고 차갑고 말랑말랑했던 귀 안쪽과, 작고 예뻤던 앞발을 가만히 만지고 싶다. 착하지만 한 성깔 하는 하늘이는 아마 금방 화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니까 그래도 한 번은 허락해주지 않을까.
2019.6.6.(목)
딱 10주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가장 혜택을 받는 이는 역시 나 자신임을 실감한다. 안주할 수 없게 만든다. 지금에 만족해서 늘어져있으면 이런 글을 쓸 수가 없으니까. 뭐라도 접해보려 애쓰게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몇 개월 전 저자 사인회에서 김영하 작가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계속 쓰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계속 써봐야겠다.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문장들만 골라서 쓴 건 아닌지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지속적으로 찾아오지만, 그래도 계속 써봐야겠다. 그래야 이긴다고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