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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y 12. 2019

생각의 일기 6주차

2019.5.4. ~ 2019.5.9.

2019.5.4.(토)

-2019 조선통신사축제


1.

누군가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앞모습은 의외로 많은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뒷모습에 그 사람에 대한 대단한 진실 같은 것이 숨어있을 리 없지만, 적어도 보는 이를 현혹하는 이목구비와 표정은 없으니까. 그리고 뒷모습을 자신이 의도한 대로 연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언젠가 내가 촬영한 사진들 중 사람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들만을 따로 모아 폴더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사진은 예상대로 많았다.

나의 이런 취향은 사진이나 그림을 볼 때에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게 아닌 모양이다. 유명인을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대중들이 흔히 알고 있는 앞모습에는 언제나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긴 즉시 구할 수 있는 최대치의 뒷모습을 모아 은밀히 기뻐하고 빠져들곤 했다. 이때의 뒷모습을 ‘스포트라이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바꿔 표현할 수도 있겠다. 앞과 뒤를 모두 어느 정도 알고 나서야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 그러니 아이돌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도록 훈련받는다.


2.

작년, 일본의 이른바 ‘골든 위크’ 기간에 나는 후쿠오카에 있었다. 금요일에 반차를 내고 사무실을 빠져나가 공항으로 내뺐다. 먼저 후쿠오카에 가 있던 동생을 텐진역 부근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타국에서의 건조한 재회 후 역사를 빠져나갔을 때, 입이 떡 벌어졌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도로도 통제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곧 퍼레이드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골든 위크를 맞아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였고, 동생과 나는 애초의 계획을 잠시 잊고 퍼레이드 구경 행렬에 합류하기로 했다. 햇빛이 정수리와 목덜미를 때렸고, 구경꾼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기다림이 너무 힘들어 그냥 걸어서 어디로든 가볼까, 하던 차에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예상보다는 화려했지만 역시나 큰 감흥은 없는 퍼레이드를 이십 분 정도 구경한 후 우리는 배도 고프고 덥기도 하고 하여, 골든 위크를 위해 열린 일종의 먹거리장터로 향했다. 오코노미야키와, 또 뭘 먹었더라. 아무튼 사먹는 족족 대성공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은 걸으면서 먹고, 아무데나 앉아서 먹었다. 나와 동생은 앉아서 먹다가, 걸었다가 했다. 걸어 다니던 끝에 잔디 무성한 어떤 평지를 발견했는데, 거기 그 사람들이 있었다. 퍼레이드 출연진들. 한두 팀이 아니었다. 이곳이 일종의 집결지인 듯 보였다. 출연을 했던 사람들인지, 할 사람들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조금 지쳐 보였다. 그들의 집결지는 그늘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 더욱 그랬다. 짧은 단발을 한 여학생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퍼레이드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앞모습보다 훨씬 강렬했다. 방금 전 퍼레이드를 보며 큰 감흥이 없다고 생각한 게 조금 미안해졌다.


3.

토요일을 맞아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남포동에 갔다. 관광버스와 사람의 수가 심상치 않았다. 알고 보니 조선통신사축제 기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로는 많이 들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우리가 너무 핫한 날에 나왔다며 웃었다. 식사도 하고, 시계도 고치고, 옷과 커피도 사서 주차장으로 돌아가던 중에 조선통신사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기시감을 느꼈다. 물론 후쿠오카만큼의 인파는 아니었지만 차도는 통제되었고, 날도 갑자기 더워져 있었다. 우리는 잠깐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다 다시 용두산공원 쪽 공영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저 멀리 용두산공원 쪽에서 새로운 행렬 팀이 계속해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용두산공원이 이들의 집결지였겠구나. 안 그래도 나는 점심을 먹으며 엄마에게, 오랜만에 용두산공원이나 가볼까, 거기 팔각정에 투썸플레이스 있는데, 하며 말을 꺼냈던 터였다. 단순히 주말이니까 사람이 많겠지 싶어 올라가지 않았었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거기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두산공원에 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퍼레이드의 뒷모습을 또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므로.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길의 인도는 좁았고, 우리는 퍼레이드의 출연자들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조심, 하지만 재미있게 걸었다. ‘ㅇㅇ초등학교’ 깃발 아래 초등학생들이 행렬을 이어가고 있었다. 학교도 안 가는 주말에 이게 웬 고생인가, 하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축제 한복판에 등장한 축제의 뒷모습 혹은 그림자였다. 덕분에 축제는 아까보다 조금 더 빛나 보였다. 그들의 뒤에 대고 괜히 박수를 몇 번 쳐주었다.





2019.5.5.(일)

-<케빈에 대하여>(2011)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언젠가는 결말을 모르고 보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건너뛰세요.)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는 분명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인 것 같다. 예민하여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잘 다루지도 못한다. 육아보다 일을 더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에바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케빈이다. 케빈은 매순간 엄마인 에바와 대립한다. 영화의 외형은 모자간의 흔한 갈등일 수도 있었던 이 대립이 어째서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애초에 출산과 육아와는 거리가 멀었던, 또한 아이를 낳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에바는 케빈을 낳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케빈은 일종의 사이코패스로 자라난다.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 것 같은 엄마 에바를 쥐락펴락하면서. 그러다 결국 아빠와 여동생을 죽이고, 학교로 가 재학생들도 죽인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교훈은 역시, 나 같은 사람은 아이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이야기를 이렇게 읽어버리면 몇 가지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며 영화가 이상해진다. 케빈은 왜 에바를 죽이지 않았는가. 에바는 왜 꾸준히 그런 케빈에게 면회를 가는가. 에바의 집에 결코 사라지지 않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그 붉은 낙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에바는 그간의 갈등이 무색할 정도로 케빈의 죄를 자신의 죄로 떠안는다. 그러니 그렇게도 끈질기게 케빈과 면회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지. 케빈이 다니던 학교의 피해자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길을 가다 뺨을 때려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고, 끊임없이 누군가 집에 묻혀둔 붉은 페인트(혹은 피)를 닦아낸다. 그러나 그 붉은색은 어쩐 일인지 아무리 지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에바를 붉게 물들인다. 그녀는 이 모든 게 '내 잘못'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케빈이 그렇게 된 게 모두 에바의 잘못인가?


영화의 후반부, 에바는 케빈이 끔찍한 연쇄 살인을 저지른 그 날의 기억을 꿈속에서 마침내 모두 복기한다. 준비되지 않았던 에바의 잘못된 양육이 케빈을 그렇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케빈 역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다. 어쨌든 내가 아닌 아들이 학생들을, 내 남편을, 내 딸을 죽였다. 또한 나 혼자 케빈을 만든 게 아니지 않은가. 에바는 완성된 꿈을 통해 그 사실을 재확인했다. 케빈의 죄를 자신의 죄로 동일시하던 지난날과 달리 이제 에바는 이를 분리해낸다. 그 날 아침,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던 에바의 집 외관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새하얗기만 하다. 그녀를 붉게 물들인 죄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면회 중 케빈의 태도도 평소와 달리 뭔가 주눅 들어 있다. (물론 곧 성인 교도소로 가게 되어 긴장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그 때문이라고 하기엔 과도할 정도로 태도가 달라져 있다.) 에바의 변화를 케빈이 모를 리 없다. 케빈은 당혹스러워한다. 성인교도소에 가게 될 케빈이 두려워하자 에바가 케빈을 꽉 껴안기까지 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를 일종의 서툰 사랑 방법으로 이해했다. 둘은 그간 서로의 사랑을 갈망했으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영화의 끝까지 가서야 에바는 케빈에게 서툰 애정 표현을 했다는 것.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내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케빈은 지속적으로 에바의 심리를 착취했다. 처음에는 사랑이 원인이었다손 쳐도, 점차 습관으로, 다시 쾌락으로 원인이 이어졌을 것이다. 종국에는 살인을 통해서까지 착취를 멈추지 않을 만큼. 착취의 도구는 죄책감이었다. 자신을 낳은 것, 그리고 자신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은 것. 그러나 그 마지막 면회장면을 전후하여 에바는 케빈의 심리 착취에서 해방된다. 일반적인 모자지간,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파워게임에 가까운 것이다.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아예 둘이 앉는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케빈이 앉던 곳에 에바가, 에바가 앉던 곳에 케빈이 앉아 있다.) 그렇게 영화는 모성애의 신화를 파괴한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처럼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가령 에바의 죄의식을, 이 사회가 그간 여성들에게만 당연한 듯 부과해 온 출산과 육아 등의 무거운 책무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에바와 케빈은 애초에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라는 해석은? (영화는 둘의 세수 장면을 두 번씩이나 겹쳐 보여준다.) 생각하면 할수록 흥미로워진다. 문제는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활발하게 떠들기엔 내가 너무 늦게 봐버렸다는 것 뿐.


세상에는 비평을 기다리는 영화와 비평을 멀리하는 영화가 있는 것 같다. 이 (어딘가 조악해보이지만 나름대로 괜찮다고 자평하는) 구분법에 따르면 <케빈에 대하여>는 명백히 전자에 속하며, 나는 전자에 속하는 영화들을 편애한다. 비평을 기다리는 영화들은 보는 이가 마치 레고를 조립하듯이 영화를 조립해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에, 볼 때마다 새롭고 흥미로워진다. 놓치고 지나간 부분들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해석의 주체인 '나'가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이 영화를 조금 더 들여다볼 작정이다.





2019.5.6.(월)

-‘치과에서’, 윤종신(2010)



오른쪽 위, 아래 사랑니를 뽑았다. 간만의 황금 같은 휴일에 이 뽑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시간이 다 가버렸다. 처음 간 치과에서 난색을 표해 시내의 치과외과까지 가 발치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기이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윤종신의 ‘치과에서’를 들었다. 전에는 그저 가사가 참신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입을 벌린 채 위-잉 소리를 하루 종일 견디고 보니 윤종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의사가 치료행위를 하는 동안 나는 분명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인데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을 이런 가사로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래의 화자는 한창 열일하는 그라인더에게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네가 처음 보는 상처가 있을 거라고, 그것도 갈아 없애 달라고 말한다. 그 상처는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짐작컨대 이별 후의 상실감일 것이다. 치과 치료를 받으면서 이별의 아픔을 생각할 겨를이 있다니! 그것도 그라인더에게 부탁을 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치과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쓰게 된 가사라고 하니, 여전히 믿기지 않으면서도 약간 반성하게 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딴 생각, 이상한 생각을 해야 이런 창작이 가능한 것일 텐데 나는 너무 과하게 내 이에만 집중했구나. 앞으론 이상한 생각들을 더 많이 해야지. 왼쪽 사랑니 두 개 뽑을 땐 한 번 노력해보아야겠다(?). 보나마나 잘 안 될 것 같지만.


어쨌든 이 가사, 겪고 보니 천재적이다. 실은 주말 내내 이가 너무 아파 사랑니 때문인줄도 모르고 일단 치과를 갔던 것이었는데, 주말에 나를 덮친 그 치통은 진통제를 먹고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그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을 굳이 비유로 설명해야만 한다면, 사랑니를 뽑기 전 이틀 간 겪었던 격심한 치통에 겨우 빗대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019.5.7.(화)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앤디 앤드루스


어렵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폰더 씨가 위대한 위인 혹은 신적 존재들을 만나 마치 퀘스트를 수행하듯 삶의 깨달음을 하나하나 얻어 나가는 과정이 담긴, 일종의 자기계발소설. 어려서 읽은 책이라 다른 부분들은 모두 잊었지만, 폰더 씨가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이야기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내 기분도 마찬가지로 생생하다. 무언가 울컥, 하고 차오르는 느낌이었는데 아마 이 부분을 읽으면서였던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다.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
가브리엘은 등 뒤의 날개를 가볍게 흔들면서 데이비드에게 다가와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오른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데이비드 폰더, 이곳은 존재할 뻔했지만 결국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모아놓은 장소입니다.”
데이비드가 충격으로 거의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데 대천사가 그의 손에서 아이들 사진을 가져갔다. 그 사진을 쥔 채 대천사는 그곳의 주위를 크게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열심히 일을 하고 또 기도를 올렸더라면 그들에게 주려고 마련해 놓았던 물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일하지도 않기 때문에 취소되어 여기에 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창고는 용기 없는 사람들의 꿈과 목표로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폰더 씨는 거기에서 현재 자신의 딸을 괴롭히는 질병에 대한 치료법, 그리고 ‘낳을 수 있었으나 낳지 못한 아이’들의 사진을 본다. 그는 가브리엘에게 이것들을 자신이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지만 가브리엘은 거절한다. 이미 늦은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보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 부분을 이해했던 것 같다. ‘내가 원했으나 갖지 못했던 것들 중 기도가 부족해 얻지 못한 것들이 있겠구나.’ 그러나 오늘 다시 읽은 ‘가브리엘’ 파트는 내게 행동과 인내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하프타임의 스코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비극은 인간이 그 게임에서 진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이길 뻔한 게임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가브리엘이 폰더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리라. 회피하거나 우회하려 들지 말고, 물러서지 마라. ‘믿음’을 갖고 꿈에 매달리라. 아, 이 얼마나 교과서적인지. 그러나 다시 읽으면서도 울컥, 하고 뭔가 차오른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런 교과서적인 교훈을 알면서도 삶에 적용하지 않아 결국 놓쳐버린 어떤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폰더 씨의 그 눈물과 무너짐과 체념에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폰더 씨는 퀘스트를 모두 수행하고 현실로 돌아와 결단과 희망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것은 이 책이 끝나는 방식이며, 동시에 독자인 내가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기도 하다.




2019.5.8.(수)


불과 10분 전에 내 인생의 한 시기가 등 뒤에서 쾅, 하고 닫혀버렸음을 뒤늦게 알아챘을 때의 서늘함.





2019.5.9.(목)

-‘The messenger’, linkin park(2010)

https://www.youtube.com/watch?v=KDOkMSf-F14


노래가 아름답다. 가사가 특히 아름답다. 높은 음을 정면돌파하는 체스터의 가창이 아름답다. 그러나 마냥 아름다운 곡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사에선 분명히 “When life leaves us blind, Love keeps us kind.”라고 했는데. 정작 그는 Love가 부족했던 것일까. 이 노래를 부른 이가 세상을 스스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노래의 가사를 절실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듣는 이에게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록 그 믿음은 실패하였을지라도 이 노래와 그의 목소리는 세상에 여전히 남아 있고, 덕분에 듣는 이들은 오늘도 이 노래의 가사를 절실히 믿고 싶어 한다. 삶이 아무리 우리를 못살게 굴어도 사랑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거창하지는 않아도 손에 꼭 쥐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어떤 신념.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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