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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칭공학자 이한주 Jan 30. 2021

소설 좋아하세요?

레이먼드 카버 vs 레이먼드 챈들러

   어쩌다가 두 레이먼드, 레이먼드 카버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함께 읽었다.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 소설로, 챈들러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유명하다. 재밌게도 둘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작가라고 한다.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며 정밀 묘사의 힘을 느꼈다. 글 한 줄 쓰기도 버거운 나 같은 사람과 달리 작가는 단 한 장면을 보아도 한 페이지로 묘사한다. 근데 그게 지루하지 않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상황으로 끌려가게 된다.


  레이먼드 카버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냥 어떤 사람의 어떤 날의 이야기이니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특별한 교훈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툭 끊어 버린다. 그런데 뭔지 모르게 그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퀭하게 울린다. 처음으로 '깃털들'이라는 작품을 읽을 때 속으로 '이게 뭐지? 뭔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라는 의문이 계속 생겼다. 결국 소설을 끝까지 읽어도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는다. 작가는 설명을 거부하고 묘사를 계속한다. 우리 삶이 원래 그렇게 별거 아닌 일상의 연속 아닐까? 소설이란 남의 일상을 엿보는 거다. 불쑥 남의 하루를 지켜볼 기회가 생긴다 해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 등장인물과 연합하여 나의 삶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면 그로 족하다. 

작가라면 다소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가끔은 절대적이면서도 소박한 경이로움 앞에 멈춰 서야 한다. 입을 쩍 벌리고 이런저런 사물, 즉 일출이나 낡은 구두 같은 걸 멍하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레이먼드 카버

담배와 술이 잘 어울리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카버는 간결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김훈 작가도 그렇다. 글쓰기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간결한 문장이 미덕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거다. 하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장은 길다.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다. 다음은 [밀고자]에서 주인공이 급하게 차를 몰아 증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장면의 일부다.
'그레이 호수는 샌앤젤로 동쪽 언저리에 있는 두 무리의 작은 산들 사이 절개지에 조성된 저수지였다. 좁지만 돈깨나 들여 만든 포장도로가 작은 산을 감아 돌고, 드문드문 흩어진 싸구려 방갈로 몇 채로 들어가는 작은 커브 길이 언덕길 옆에 나 있었다. 우리는 주행 중에 거리 표지판을 읽으며 산속으로 치달렸다. 회색 비단 같은 호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부스러지고 있는 제방 도로에서 사용되지 않는 보행로 위로 토사가 흘러내렸다. 땅다람쥐 구멍이 즐비한 풀밭에서 잡종견이 사냥감을 찾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급하게 달리는 와중에 보이는 주변의 거리 모습을 왜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는 걸까? 아가사 크리스티라면 "우리는 급하게 차를 몰아 증인이 사는 랜루프가 1723번지로 달려갔다.'라고 끝냈을 것 같은데. 근데 이런 세부 묘사가 꽤 맛있다. 그 표현 안에서 독자가 그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은 단순히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는 작고 사소하고 미묘한 경험들이 가득 차 있다. 그 자잘한 것들과 함께 하는 게 진짜 삶이다.

인생은 비정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하지만 비정함만으로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 필립 말로(레이먼드 챈들러의 탐정 캐릭터)
레이먼드 챈들러 역시 담배와 술...


한참 동안 전문서, 실용서만 읽다가 다시 소설 읽는 맛을 느낀다. 오늘도 낯선 곳, 낯선 인물들의 삶을 슬쩍 경험하는 재미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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