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기억에 먹먹해진 가슴

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 김현식 '가리워진 길'

by 작은노래


<서랍 속의 글>

그 언덕은 여전히 가파른 언덕이었습니다. 내가 20여 년을 살았던 집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바로 산 아래에….

걸어서 오르던 그 언덕을 차로 오르는데 어찌나 아찔하던지요. 중간에 멈췄다가는 뒤로 밀릴 것처럼 가파르더군요. 45도-50도 정도로 경사진 곳도 있었습니다. 지금 그 집에서는 막내고모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가끔 막내 삼촌도 들리시는 걸 알고 있기에 시간을 맞춰 새해 인사차 들러 보았습니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나는 그 집에서 초등학교 시절, 중고 시절, 대학시절, 직장 생활을 두루 거쳤습니다. 내 삶의 버팀목이던 아버지도, 따뜻한 사랑을 가르쳐 주신 할머니도 그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루에 한 번 그 언덕을 올랐다 해도 나는 8천 번 이상 그 언덕을 올랐을 겁니다. 올라갔던 그 숫자만큼 내려오기도 했을 텐데 내 기억 속에는 올라가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아마도 언덕을 올라 집에 가는 시간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올라가던 시간이었기에 그리움 같은 걸 안고 올라갔었겠지요. 어쩌면 허전함인지도 모릅니다.

그 언덕길을 바래다주었던 사람도 참 많았습니다.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집까지 함께 왔던 친구들. 뭐 그리 할 이야기가 많은지 번갈아 집을 드나들었던 친구들. 풋사랑의 소년들. 설레는 마음으로 만났던 사람들…. 그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남편이었죠.


울면서 언덕을 오르던 기억도 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오르던 그 막막한 언덕길….

4남 5녀 중 맏아들인 아버지에게 시집와 시집 식구들과 신산한 삶의 나날을 두루 겪었던 어머니가 막내고모를 시집보내고 엉엉 우시는 걸 보면서 뭔가 모를 쓸쓸함을 느끼며 언덕길을 오르던 날도 생각납니다.

대학입시 공부에 몸과 마음이 지쳐 허우적 허우적 오르던 언덕길….

누군가와 헤어져 그 허전함을 달랠 길 없어 한없이 힘들게 느껴졌던 언덕길….


아, 딱 한 순간 남다른 마음으로 언덕길을 내려오던 때가 생각납니다. 결혼하는 날 아침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내려오던 그 날은 올라가는 언덕길이 아니라 내려오는 언덕길이 생각납니다. 내 집에서 나와 내려온 마지막 언덕길이었으니까요. 그 뒤 몇 번 더 그 언덕을 오르내렸지만 나의 집은 다른 곳이었습니다.


골목길을 걸어 그 집에 들어가며 8천 번 오르고 내린 그 세월들이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 숱한 기억들이 가슴에 담기노라니.


나는 문득 골목길을 들어서던 당신의 검은 얼굴을 떠올립니다. 혼자 걸을 수 없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던 당신의 얼굴. 그보다 며칠 전 병원에서 보았던 당신의 얼굴과 사뭇 달라진 당신의 얼굴을.

그리고 얼마 뒤 꿈속에서, 달리는 자동차에 타고 떠나는 당신을 뒤따르다 뒤따르다 깨어난 그 며칠 뒤엔가 그렇게 당신은 떠났습니다.


나는 몇 가지 음식을 볼 때면 눈물이 핑 돕니다.

오이피클! 병이 깊어가면서 식욕을 잃은 당신은 오이피클을 찾았습니다. 언니와 나는 오이 피클을 사러 남대문 시장을 돌았지요. 그때는 그게 흔치 않았으니까요. 겨우 한 병이 있더군요. 그런데 너무 큰 병입니다. 당신은 그때 뭐든 한 입밖에 드시지 못했습니다. 어떻하지? 왜 그걸 못 사고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다만 한 쪽을 드신다 해도 사와야 하는데 어린 딸들은 ‘안 드실 걸 뭐 그리 큰 병을 사온담.’ 하는 생각에 그냥 돌아섰습니다. 당신이 우리와 그리 오래하지 못한다는 걸 미처 예상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오이피클이 오랜 시간 동안 가시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라면 국물. 그것도 나를 울게 만듭니다. 라면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국물은 먹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며 끓여달라시는데.. 난 스프만 끓여서 국물을 만들면 드시겠지 생각해서 그냥 스프만 끓였습니다. 그건 당신이 원하시는 맛이 아니었나 봅니다.


요즘 나는 그때 당신과 비슷한 증상으로 누워계신 분 때문에 자꾸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만 한입이라도 드신다면 몇 가지 음식이라도 만들려고 합니다. 한 숟가락을 드시게 하려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삽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살림 하면 안 된다고 걱정하지만 예전 당신을 생각하면 낭비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지금쯤이라면 나는 조금은 철이 들어 당신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을 듯한데… 아픈 당신 곁에서 꾸벅꾸벅 졸지는 않을 텐데…. 매일 매일 흐르는 많은 시간을 당신 곁에서 보냈을 텐데.


----------------


서랍 속의 글을 읽다보니 또 세월이 흘렀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 나는 오이피클을 볼 때 가슴이 아프지 않다. 라면도 생각 없이 먹곤 한다. 얼마 전까지 막내고모가 살던 언덕 위의 집은 재개발과 함께 사라졌다. 그 언덕길은 평평해졌고 아파트 수십 동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아버지처럼 간에 병이 있으시던 시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먼저 가신 아버지나 시아버지 생각하며 더 잘 해드리려고 했지만 아쉽게 떠나셨다. 또 회한이 밀려든다. 그렇게 이별할 줄 알았다면 좀 더 많은 시간 함께 할 걸. 두고두고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끼던 사랑과 존경. 더 풍성하게 표현할 걸.


아직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어서 적을 수 없는 기억들도 있다. 그 기억을 되새기고 되새긴다. 내 마음 속에서.


정현종 시인의 시구처럼 사랑은 늘 생 뒤에 오는 것일까.


나는 무수히 밀려오는 기억 속에서 낮게 읊조린다


"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고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 주오."


그대여 힘이 되 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그 길목 길목에서.


김현식 '가리워진 길'

https://www.youtube.com/watch?v=Yx1yFb5pNCY

keyword
이전 10화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