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최양숙 '가을 편지'
어제 서오릉의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나뭇잎은 나를 기다린 것일까? 바람에 흔들리며 내 가는 길 앞에 떨어져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잎이 떨어진 나무의 빨간 열매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가끔씩 가을 햇살이 나뭇 가지 사이에서 길게, 짧게 빛을 비춥니다.
가을길은 쓸쓸합니다. 아름다움 한 자락 남기고 흔들리며 떨어지는 나뭇잎 때문인지, 뺨을 스치고 가는 쌀쌀한 바람 때문인지, 하늘을 조각조각 내는 듯한 앙상한 가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산을 불태우듯 물드는 단풍도, 노란비처럼 내리는 은행잎도 너무나 아름다워 슬프다는 통속적인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 대사 한 구절이 그런 것이더군요.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의 한 자락을 잡고 싶었다고, 물드는 나뭇잎이 보고 싶었다고.
나는 쓸쓸함을 느낀 첫 가을이 언제였는가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학교 선배와 함께 광화문 뒷길을 걷던 여고시절의 가을? 쓸쓸했을까? 아니 설렘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도 남아 있는 대학 4학년의 가을, 배경은 온통 아름답게 물든 나무들입니다.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내 모습에 쓸쓸함은 없습니다.
스물 일곱의 가을, 아 쓸쓸한 가을이 그때부터였나?
가을이면 천식 때문에 앓곤 했지만 그 가을엔 유난히 심하게 아팠던 것 같습니다. 가방을 열면 파란 글씨의 약봉지가 가득했습니다. 천식 약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약봉지 가득한 가방을 메고 나는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위에서 수색역을 향해 가는 기다란 기차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스물 몇 칸짜리 기차가 수색역을 향해 가는 시간은 저녁 무렵이거나 밤늦은 시간이었을 겁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빈 기차는 운행이 끝나 쉬기 위해 수색역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쓸쓸한 교정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온 나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스물 두 칸 기차는 이 밤을 쉬기 위해
수색역을 향해 간다.
스물 일곱 해 달려온 나의 몸은
어디에서 쉬어야 하나.'
나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삶의 피로를 처음 느낀 나이. 그때가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약한 몸에, 직장에, 공부에, 어긋나는 사랑에... 그래서 지쳤던 때인가 봅니다.
스물일곱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한 여자를 떠올립니다.
여자는 나뭇잎이 흩날리는 다리 위에서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속에서 기차를 바라봅니다. 여자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겠지요. 썼다가 찢고 썼다가 찢은 편지를 마음속에서 다시 쓰고 있었겠지요. 바로 다리 앞에 있던 전화 부스를 망설이며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전화를 겁니다. 유학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는 말에 냉랭하게 답하던 어느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 옵니다. '난 너의 기다림을 원치 않아.'라는 그 말에 여자는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웁니다.
울다가 울다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리를 바라본 여자는 막차일 듯한 버스를 타고 집을 향해 갑니다.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던 여자는 무릎이 푹 꺾이어 언덕에 쓰러집니다. 언덕에 얼굴을 대고 멈추지 않는 눈물을 떨굽니다. 슬프면 무릎의 힘이 빠지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요.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여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 여자는 웃으며 그 날을 기억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그 남자의 전화번호도 잊고 말았습니다.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때의 슬픔은 다른 쓸쓸함과 함께 여전히 가을이면 낙엽처럼 흩날리다 쌓인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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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스물 일곱 이후의 가을을 생각합니다. 가을을 모르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삶이 바쁘고, 모든 것을 현실 생활의 무게가 지배하고, 해야 할 일들에 치여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다 어느 때인가 가을이 몸서리쳐질 만큼 느껴졌습니다. 불타는 산은 고스란히 손끝 발끝까지 저릿저릿하게 삶을 느끼는 나의 가슴이었습니다. 나는 타는 가슴을 그렇게 산에 기댄 것입니다. 흩날리며 내 발길에 제 몸을 던지는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은 그 무엇인가를 잡고 싶은 내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나는 안타깝게 떠나는 무엇, 사라지는 무엇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슬픔과 이어진 것을 느끼면서
바위틈을 비집고 나오는 연하디 연한 잎이
그 바위를 자기 삶터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작은 씨앗이 봄 여름을 지나
숲에 넉넉하게 자리 잡는 자연의 섭리를 읽으면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나의 한 부분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발견하면서
붉은 슬픔으로 번져가는 단풍빛에
내 눈언저리 또한 붉게 물들어 가면서
얼굴이 부스스하게 불어오는 건조한 가을 바람
그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
가끔 벅차오르듯 치밀어오는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아쉬움과 설레임에 아찔해하면서
때론 삶에 대한 엄숙한 경외감에,
손끝 발끝에서부터 찌릿하게 전해지는 충격,
떨림… 삶이 주는 이 떨림에
나의 가을은 타오른다,
타오르는 가슴 산기슭에 가만히 기댄다
<나는 이렇게 가을을 보낸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노란 은행의 비는 이제 무언가에 기대어 쉬고 싶은, 삶에 스며들어 살고 싶은 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비단길이 되어 누군가의 발길을 받쳐주고 싶은 겸허한 마음입니다.
아. 가을이 지는 햇살 속에 마지막 빛을 내며 가고 있습니다.
최양숙 '가을 편지'
https://www.youtube.com/watch?v=wiVT5bJ1j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