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의 묠니르 제2부 : 만악의 근원, 판도라

제2부 제1장 : 균열

by 김하녹 Ha No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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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프로메테우스는 인간 여성에게 ‘앎’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 ‘언어’를 선물했다. 그들은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사유하고, 토론했다.
그러나 속좁고 옹졸한 제우스는 이 광경을 질투했고, 프로메테우스에게 신권 반역의 누명을 씌워 그를 영원히 타오르는 화형대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간 여성들은 분노했고, 제우스의 신전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격분한 제우스는 천둥과 번개를 지상에 내리꽂으며 분노를 쏟아냈지만, 여성들의 결의는 그 정도로 꺼질 불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를 태우는 화염과 그 뜨거운 분노는 올림포스를 집어삼킬 듯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한낱 인간 여성이, 신들의 왕에게 항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허

나는 공허 속에서 태어났다.

차가운 물방울이 뺨에 떨어졌다.
깜빡—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 나는 홀로 놓여 있었다.
거대한 천체가 둥둥 회전하며 울리는 소리에 가슴이 쿵쿵 뛰고, 귀는 점점 먹먹해졌다.
온몸이 괴로움에 비명을 질렀다.

두 귀를 틀어막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 끝없는 공간이 언제라도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실낱같이 피어나는 그 소리는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몸의 떨림이 멎고, 굉음도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리를 따라 별들이 수 놓인 길을 자박자박 걸었다.
달빛에 일렁이는 노랫소리, 바람에 실린 웃음소리—그 근원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빛줄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틈으로 퍼져 나오는 금빛 균열.

‘문이다.’

나는 확신했다.
그 너머의 세상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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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한편, 제우스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 일을 곱씹고 있었다.
방문객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타르타로스가 다시 열렸습니다.”

고개를 든 제우스는 말한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말해보거라, 헤르메스.”

“분명 들으셨을 텐데요. 타르타로스의 문이, 열렸습니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
올림포스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유일한 자.

헤르메스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제우스의 귓가에 오래된 환청이 맴돌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온 자가, 네가 앉은 왕좌를 불태우고, 이 땅의 진정한 빛이 되리라.”



‘말도 안 돼… 설마, 가이아가 돌아온 것인가?’

오래된 두려움이 제우스의 몸속을 타고 피처럼 퍼졌다.

헤르메스는 그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비웃듯 나직이 말했다.

“두려우십니까?”

제우스는 이를 악물고 헤르메스를 노려보았다.

“진정하십시오. 문이 ‘열렸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삼키지 못했다.
이 거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신은 돌아올 것이다.

제우스는 입을 열었다.

“자초지종을 말해보거라.”

“수 세기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타르타로스의 문이 열렸고, 누군가 그 문을 통과해 나왔습니다.
이 흐름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신이라 해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어차피 언젠가 열릴 문이라면, 그 책임을 뒤집어씌울 존재가 필요했다.

“그 자를 내게 데려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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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

내가 문 너머 처음 마주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간밤 비에 반짝이는 나뭇잎들,
들풀의 냄새.

나는 초원을 달리며 세상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다 문득,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공허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언덕 아래,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 여인들이 모여 춤추고 있었다.

“위대한 신, 우리의 근원, 만물의 뿌리—”

그들의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바람에 흩날릴 때,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헤르메스의 지팡이였다.

“안녕.”

“….”

“미안. 네가 저들에게 가는 걸 말려야 했거든.”

“왜?”

“…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말하마.
자, 가자. 신들의 왕이 너를 찾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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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외피

올림포스의 신들은 내게 하나씩 축복을 내렸다

헤르메스는 내게 처음 지닌 마음을 지키는 힘과 바람의 축복을,

아르테미스는 어둠을 밝히는 달빛의 힘을,

데메테르는 단 한 번뿐인 생(生)을,

아테나는 어떤 싸움에서도 승리할 힘을,

페르세포네는 영원한 안식에서 깨어날 단 한 번의 기회를,

헤스티아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그러나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저 흉측한 모습을 바꿔줘야지. 하하하!”

그 순간, 사랑과 욕망의 신 아프로디테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너의 눈은 우주처럼 반짝이고,
너는 네 모습 그대로 아름답단다.”

제우스는 그 말을 자르며 명령했다.

“아프로디테, 그 아이의 껍데기를 지우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라!”

그의 말에 아프로디테는 침묵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와 같은 모습…’

분노, 수치, 무력감이 뒤섞인 감정이 그를 휘감았다.
그러나 제우스는 아프로디테의 생각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도 되는’ 존재로 여겼을 뿐.

아프로디테는 생각했다.

‘나는 사랑과 욕망의 신이지만,
언제부턴가 선택하는 자가 아닌
선택받는 자가 되어버렸어…’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말했다.

“아프로디테 님,
제게 당신의 축복을 주세요.”

그제야, 아프로디테는 결심했다.

“나, 사랑과 욕망의 신 아프로디테는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소중한 마음을,
그리고 ‘판도라’라는 이름을,
나와 같은 형상을 선물합니다.”

은빛 연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러자 신전 곳곳에서
비웃음 섞인 말들이 터져 나왔다.

“여자들이 질투하겠는걸.”
“연회장이 다 환해졌네. 역시 여자는 꽃이야 꽃”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시선의 끝에서 깨달았다.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형상—

나에게서, 아프로디테에게서,
마을의 여인들에게서도 보았던.

인간, 그러나 인간이 아닌.
신도 아닌,
‘여자.’

그 순간, 제우스가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

“판도라, 이 상자를 가지고 가거라.
그러나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

“… 열지도 못할 상자를 왜 저에게 주십니까?”

“인간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문은 언젠가 열릴 것이다.
그때 너, 판도라.
너를 통해 이 땅에 재앙을 풀어놓겠다.
그리고 모두가 오직 너의 이름만을 기억하게 하겠다.’




안녕하세요. 창작자 김하녹입니다.

오늘도 소설 <헬라의 묠니르>를 찾아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감사드리며,

김하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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