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만악의 근원, 판도라

제5장. 마고 이야기.

by 김하녹 Ha Nok Kim



판도라와 에피메테우스,
그리고 여인들이 함께 상자를 열자,

오랜 시간을 상자 속에
갇혀 있었던 존재들이,

강렬한 빛과 함께
상자 밖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갇혀 살았던가!"

제우스의 두려움의 근원, 타르타로스에 봉인되었던
제우스의 형제 티탄족과 대지의 신
가이아가 영겁의 시간을 견뎌낸 뒤,
마침내 눈을 떴다.

"내가 그립지 않았는가,
신들의 왕 제우스여.
나는 오로지 이날만을
기다려 왔느니라."

대지의 신 가이아의
선명하고 붉은 분노가
상자 밖 세상으로 뻗어 나왔다.

서늘한 기운이 제우스의 온몸을 감쌌다.
수세기를 견뎌온 가이아의 온전한 분노였다.

"가이아 네년!
네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산재로 도둑을 낼 것이다!"

가이아의 목소리가 온 대륙에 울려 퍼졌다.

"외면하고 지우려 한들,
지워지지 않는 진실이 곧 드러날 것이다.
자네도 알지 않나?
이 세상의 진짜 ‘근원’이 누구인지?"

지금부터 제우스가 지우고자 했던,
그리고 그 스스로도 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세상의 시작점에
전지전능함이 존재했다.

그의 이름은 ‘마고.’

무엇이든 알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불로불사의
전지전능한 존재.

그러나 그는 존재함과 동시에
무력해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무함에 잠식하게 하였고,

이미 모든 것을 알기에
알고 싶은 것이 없었으므로
공허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가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그는 영면에 빠지기 전,
전지전능한 자신의 존재를
불완전한 수천 갈래의
조각으로 쪼개어
이 세상에 흩뿌렸다.

마고로부터 나온
수많은 빛의 조각들,
그것은 곧 ‘나’이자
‘우리’였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가 되어
수많은 별 조각이 되어,
이 세상 곳곳에 파편으로 흩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생명을 잉태하고, 창조하고, 번영시켜
불완전하고도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 동물, 자연,
그렇게 다시금 모든 것이 되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새로운 ‘우리’는
불완전했기에
완전함을 갈망했다.

단 한 번뿐인 삶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도 강해졌다.

우리는 소망했다.

“부디, 소중한 존재를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지켜 주세요.
그들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
행복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우리의
간절한 바람으로부터,
신이 태어난다.

불완전하지만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창조의 힘을
지닌 존재.

소중한 것을 지키고,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
누군가의 안녕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삶을 귀애하는 다정의 조각들.

그것은 신의 근원,
바로 ‘처음 난 마음.’

모신의 존재를 기억하는 헤르메스가
판도라에게 ‘처음 난 마음’을 선물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가이아는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가장 큰 파편.

그는 자신이 뿌리내린 대륙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애정을 담아 보살핀 존재였다.


---

마고는 누구인가?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홀로, 태초에 모든 것이 시작된 공허 속에 남아
아주 깊고도 어두운 잠 속에 빠져 있었다.

“판도라, 이제는 눈을 떠야만 해!”

이따금 들려오던 작은 목소리,
벌떼처럼 웅웅 거리던
수많은 목소리가
선명한 하나의 의지를 전달해 왔다.

“네게는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가 있어.
그들이 지금 위험에 처해 있으니,
이제 어서 우리를 기억해 내, 판도라.”

아니,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존재하는
영원의 시간과 공간을 오가는
전지전능한 자.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 세계의 뿌리.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함께 싸워나갈 이여.

“마고,
어서 눈을 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이야기야.”

잊고 있었던 기억이,
끝없는 공허 속의 감각이,
타르타로스에 갇혀 지내던 날들이
하나둘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슴을 두드리는 거센 심장 박동에,
나는 내가 ‘여기에’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느낀다.

판도라가 눈을 떴다.

‘나는 마고였고, 마고는 곧 나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 인간 ‘판도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지럽게 생각이 얽히는 가운데에도
나는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이름을 기억해 낸다.

에피메테우스.

지척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그 비명 속에
그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에피...!!!’

제우스가 에피메테우스를 인질로 잡아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어리석은 판도라,
네가 나를 의심한 대가가 바로 이것이다.
가이아가 돌아왔다 해도,
나는 죽지 않는 불로불사의 존재.
그러니, 결국 죽는 것은 너희 인간들뿐이다.”

“에피! 안 돼!!”

제우스는 판도라를 힘껏 비웃었다.

“판도라, 한낱 인간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나는 너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주마.”

“제우스, 당장 그를 내려놔!
감히 그를 건드리면,
너를 내 손으로 찢어
발길 것이다!”

분노에 찬 판도라, 아니 마고의 목소리가
온 대륙을 울렸다.

‘판도라, 나는 네게 <처음 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선물한다.’

이제야, 나는 헤르메스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다.

신의 근원.
바로 ‘처음 난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잊은 자.

“제우스,
너는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구나.
너는 이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

제우스의 핏발 선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너희 건방진 계집들 모두, 이 자리에서 모조리 쓸어버려 주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쇄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우레와 함께,
묠니르가 날아와
에피메테우스의 목을 조르던
제우스의 손에 명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모두의 시선이 묠니르가 날아온 방향을 향했다.

천둥과 번개의 신,
아스가르드의 통치자,
묠니르의 진정한 주인인,

헬라였다.

“… 삼촌,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그러나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사실을 당신이 잊고 있으니—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권능은,
본래 당신의 것이 아니지 않소?”

헬라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제우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그 힘은 본디,
내 어머니 오딘으로부터 비롯되어,
아스가르드의 정당한 후계자만이
전승받는 강력한 권능.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우리의 딸들에게 이어지던 그 권능을—
당신이 무슨 권한과 염치로 탐하지?”

“헬라,
네, 네가…
그걸 어떻게…”

“그러면 내가,
당신의 그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았습니까?”

제우스와 헬라의 질긴 악연은,
그리 멀지 않은
옛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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