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판도라의 고백
“어리석은 판도라.
내가 늘 의심하지 말라고 했거늘.
결국 나의 뜻을 거스르고,
나를 의심하여 대가를 치르는구나.”
그러나 한 번 고개를 든 의심은,
똬리를 틀고 거침없이 내게 속삭여왔다.
‘판도라, 의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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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신들의 왕이자,
위대한 지도자인
나 제우스의 명령을 거스르고,
내 뜻을 의심하려 할 때마다,
네 몸은 깨어지고 부서져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니-.
너는 목숨이 아깝다면,
한 번뿐인 이 생을 더 살아가고 싶다면,
나를 대신하여 그 상자를 열어라.”
판도라의 몸이 굳어졌다.
‘역시 함정이었구나.’
제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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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게 그 하찮은
계집들을 바쳐라.
나를 대신하여 이 땅에 재앙을 초래할,
만악의 근원 판도라여.
너는 결코 이 덫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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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는 균열을 감추기 위해
창고 안으로 숨어들었고,
며칠간 두문불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우스는 다시 천둥과 번개를 내려쳐
여인들이 겨우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침략이었다.
‘평화를 위해
싸울 때가 왔구나.’
에피메테우스는 직감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침략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마지막 결전,
예언 속의 이야기,
최후의 전쟁 <라크나뢰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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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소란스럽구나.’
나는 인간을 피하며 균열을 감춰왔지만,
때아닌 소란에 밖으로 나왔다.
제우스가 마을을 다시 침략했다.
나는 직감했다.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이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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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상자를 열지 않으면,
계속해서 당신을 의심하면,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이라 하셨지요.”
판도라는 상자를 들고 제우스를 향해 나아갔다.
판도라의 모습을 본 에피메테우스와 여인들의
눈빛이 놀라움과 걱정으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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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당신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나는,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부서지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상자를 열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을 해칠 수 있는 ‘재앙’을
세상에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판도라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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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파괴하는 법밖에 모르는 적 앞에서,
이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당신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제우스,
이건 당신은 평생 받아본 적도,
받아볼 수도 없는 마음입니다.”
판도라의 시선이
여인들과 에피메테우스에게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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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여러분, 이 자리를 빌어서,
나의 마지막 염원을 담아서,
나는 고백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관계를 참으로 쉽게 깎아내립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야-
그럼에도 나는 그대들을 바라보고, 듣고,
그대들도 나를 마주하고, 안아주니,
우리의 견고한 자매애를, 사랑을, 우정을
누가 침범할 수 있을까요.
그대들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나는 칠흑같이 어둡고
끝없는 공허 속에서 태어난 자.
나의 그 작고도 좁은 세상에
그대들이라는 균열이 생겨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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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왔다.
마음이 일렁이던,
여름날의 푸른 바람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간지럽고,
맞잡은 두 손의 온기가 저릿하도록 따뜻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대지와 바람의 향기를
함께 느끼던 나날들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찰나는 영원과 같다더니,
당신들과 함께한 찰나가, 매 순간이,
내게는 영원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의심의 대가로,
제우스의 명을 거스른 벌로,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나는 우리의 모든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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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에피메테우스가 판도라에게 다가왔다.
“판도라, 우리 함께
이 상자를 열자.”
“…”
“우리는 함께
이 상자를 열어서,
누구나 기억할,
빌어먹을 이 세계를 뒤엎을
끔찍한 재앙이 되어주자.
모두가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던 그 상자를,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 함께 열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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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재앙을 초래한다 해도,
우리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굳게 닫혔던 상자의 문을,
판도라와 여인들이 함께 여는 바로 그 순간.
수많은 목소리가 상자의 틈새 사이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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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는가!”
"문이 열렸어! 드디어 문이 열렸다고!”
웅성이는 목소리는 곧 눈부신 빛으로,
흐릿한 형체로,
뚜렷한 형상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오기 위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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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영겁의 시간을 지나오며,
너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상자 안에 봉인되었던
타르타로스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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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우리의 육신을 가두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영혼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머물러 때를 기다렸을 뿐.
너는 우리가 미쳐있다고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사실 너는, 우리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느냐?”
티탄족의 원한이 상자 밖 세상까지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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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너를,
타르타로스라는 끝없는 공허 속에 처박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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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상자 속 세상에서,
타르타로스에서,
그들은 조용히 때를 기다려왔다.
자신의 손으로 가뒀던 형제들을 다시 마주한 순간,
제우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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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네 두려움,
공포, 불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그 자체.
그러나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오랜 시간을 상자 속에
갇혀 있었던 존재들이,
강렬한 빛과 함께
상자 밖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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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와 여인들이 함께 상자를 열자,
그 안에 갇혀 있던 고대의 신들이 깨어나,
제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최후의 결전 ‘라크나뢰크’가 도래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