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상자 밖의 세상
에피메테우스와의 대치 이후,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 변두리의
작은 오두막으로 향했다.
깊은 잠에 빠져들던 어느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눈을 뜨니, 그가 서 있었다.
“신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더라.”
에피메테우스였다. 그는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렸다.
“머리맡에... 반창고랑, 신을 것 좀 놔뒀어.”
그가 지핀 화롯불의 온기 때문이었을까.
낮에 마주했던 서늘한 기세는,
이 오두막 안에서 조금은 녹아내린 듯했다.
“고마워요.”
“….”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 에피메테우스. 에피라고 불러.”
툴툴대는 말투 속에 따뜻함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외로웠구나.'
에피메테우스의 화살이 스친,
불에 덴 듯 쓰라린 뺨의 상처.
그 상처 위로,
비처럼 내리는 다정함이 조심스레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잎사귀, 여름밤의 별빛, 맑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청명한 하늘 아래, 그들의 존재는 마치 한 폭의 노래처럼 대지를 수놓았다.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것이 바람 때문인지,
그들의 말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저것이 프로메테우스 님의 선물이구나.'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언어’란 무엇이기에, 마음을 잇고, 시간을 나누게 하는 걸까?
여인들은 함께 모여 우주의 이치를 탐구했다.
진리를 갈망했다.
비록 그것이 신의 분노를 사더라도.
… 나는 언어가 없다.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지식을 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함께 웃고, 울고,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간절하고도 따뜻한 갈망이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봤기 때문일까.. 여인 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혹시 불쾌했다면 어쩌지?'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갔다.
그러나 그가 내게 건넨 말은—
“판도라, 당신도 우리와 함께 춤추지 않을래요?”
“... 제가 껴도 되나요?”
나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에피메테우스가 매서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조차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그럼요. 우리와 함께, 프로메테우스 님이 선물해 주신 ‘언어’를 공부하고, 사유하고, 함께 나누어요.”
아, 그날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달빛이 수놓은 밤,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순간.
그 기억은 내게 달보다 찬란하고,
새싹보다도 싱그럽게 빛났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사랑하여 신들의 금기를 깨고,
선물을 전했던 프로메테우스 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의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 상자.
제우스는 내게 왜 그걸 맡긴 걸까?
그는 말했다. 그 안에 인간을 위한 선물이 담겼다고. 하지만, 함부로 열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짓밟은 당사자.
그리고 재앙.
상자를 열면 치르게 될 대가.
정말로 그는 내가 상자를 열지 않기를 바란 걸까?
열지도 못할 상자를 그가 내게 줬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진실 하나.
그 자는, 나를 이용해 이 세상을 파멸하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내 마음속 어딘가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개를 든 의심은 진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대 뒤로 숨어서,
나를 앞세워-
인간과 이 세계를 파멸시키려 했던 거야.'
쩌적.
그를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
내 몸에는 수천 갈래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