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제1장. 헤라와 헬라
제우스와 헬라의 질긴 악연은,
그리 멀지 않은 옛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헤르메스가 ‘판도라를 데리고 오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받아, 판도라와 함께 올림포스에 도착했을 때,
헤라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시각, 헤라는 홀로 프로메테우스를 찾아갔다.
‘따악’
헤라가 공기 중에 손가락을 맞부딪혀 튕기자, 프로메테우스를 집어삼킬 듯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어 갔다.
불에 타는 육신은 괴로울지 언정, 프로메테우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오셨습니까. 헤라 님.”
헤라는 그런 프로메테우스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언제나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군.”
프로메테우스는 그저 평온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 그대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얽힌 시선에는 전하지 못한 마음이 엉겨 붙었다.
그 모습을 차마 드러내지도 못한 채로.
헤라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의 눈을 피해 이곳을 떠나자.”
프로메테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답변을 기다리는 찰나가,
헤라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초조해서 자꾸만 입술을 깨물게 되었다.
“... 만물에 눈과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을 살피는 신, 헤라 님.
그리하면 헤라 님께서 제우스 님으로 인해 큰 화를 입습니다.”
“나는 다 감수할 수 있어.”
프로메테우스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무거운 거절이었다.
“헤라 님, 당신 께서는 가야 할 길이 있으시지요.
비록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이지만, 제가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빛을 드리우겠습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
“연금술은 본래 보잘것없는 금속을 금으로 만들기 위한, 어둠으로부터 빛을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싹 틔우는 마법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당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있는 힘껏 나아가십시오.
제가 당신이 나아갈 길을,
뒤따라 밝히겠습니다.”
연금술사 프로메테우스.
그의 곧은 심지는 헤라에 대한 신의와 함께 자신의 육신을 불태우는 불길보다도 더 뜨거운 빛을 피워내고 있었다.
헤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차마,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깨문 입술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 반드시 다시 데리러 올게.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흔적은 이만 지우고 가십시오.”
‘따악!’
제우스의 불길이 다시금 프로메테우스를 향해 매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 너머로 헤라의 서글픈 미소가 일렁였다.
그 길로, 헤라는 올림포스 제국을 떠나, 아스가르드 왕국의 왕, 헬라를 만나러 간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저벅, 저벅.
헬라의 신전이 위치한 깊은 동굴 속에,
낯선 방문객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반가운 손님이 오셨군.”
깊은 어둠 속에서 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토를 벗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올림포스 12 신이자, 만물을 살피고 예언하는 자인, 헤라. 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얽혔다.
“…. 위대한 아스가르드의 왕,
천둥과 번개를 다루는 묠니르의 진정한 주인이신,
헬라님을 뵙습니다!”
헤라를 바라보는 헬라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자네가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용건을 솔직히 말해보거라."
헤라의 눈이 선명한 노란빛으로 빛났다.
예언하는 자의 모습으로.
“곧 헤르메스의 나팔이 울릴 겁니다.”
헤라의 말이 끝나자, 헬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 결국 때가 왔는가.”
앞날을 내다보는 헤라의 능력은 만물에 뻗친다.
헬라는 헤라가 아주 오래된 예언 속 이야기,
세계를 멸망시킬 신과 인간의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를 말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헤르메스의 나팔은, 그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를 알리는 매개체.
나팔이 곧 울린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마지막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미했다.
"헬라님, 곧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겐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의 발발을 내다본 헤라의 간곡한 요청에, 헬라는 때가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도 아닌, 헤라의 부탁이었다.
“무엇보다도 제우스를 수장으로 앞세운 아폴론, 하데스, 포세이돈 간의 견고한 카르텔을 박살 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승산이 없어요."
“포세이돈이라…”
헬라는 그를 떠올리며, 이를 사납게 갈았다.
“가이아의 능력이 아니었으면 존재하지도 못했을 작자들이, 제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헬라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흉흉하게 빛났다.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눈이었다.
“그래, 내가 헤라 자네에게는 오랜 빚이 있지.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헤라와 나의 인연은 한 겨울 혹독한 추위 가운데 피어났다.
이야기는 그리 멀지 않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야기의 모든 시작은, '아스가르드 왕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전설.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묠니르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자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평정하리라.”
그리고 모두가 그 권능을 갈망했다.
그러나 영주의 아들도,
전쟁에서 공적을 쌓고 이름을 알린 용감한 기사도,
심지어 토르조차도,
묠니르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그 모든 이들을 거부하고 묠니르가 주인으로 삼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헬라’였다.
열다섯 살의 어린 여자아이.
그 누구도 내가 묠니르의 선택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걸까?
나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악몽을 꾼다.
어찌하여 내 손에 오딘의,
아스가르드의 위대한 왕의,
어머니의 피가 묻어있는가.
어째서 내 눈앞에 그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로 누워있는가.
“…. 어머니?”
정신을 다잡을 새도 없이,
병사들이 몰려오는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있던 오딘의 침실문이 부서졌다
“반역이다!”
귓가가 윙윙거리고, 공기가 일그러지는 듯 숨이 막혔다.
“아스가르드의 왕 오딘이,
그의 딸 헬라에게 살해당했다!”
‘아니야. 어머니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
혼란을 틈타, 병사들 앞으로 걸어 나오는 이는
나의 형제 토르. 그는 나를 보며 검게 웃었다.
“당장 헬라를 생포해라!”
‘아, 그런 거구나.’
나는 내 목에 칼이 들어오고 나서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진실을 마주한다.
‘…. 토르, 네가 제우스와 공모하여
이 모든 판을 짰구나!’
이번 회차엔 특별히, 『헬라의 묠니르』 그래픽노블 버전 일부를 함께 실어보았어요.
글과 그림이 만날 때, 이 세계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느껴지길 바라며.
여러분은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나요?